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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8. 2022

[기억저장소] #5. 과거

 비가 오는 날이었다. 도준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도준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도준 역시 기억에 의해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밥은커녕 잠도 자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없었다. 그저 계속 같은 곳에 나와 멍하니 걸어 다니고, 앉아있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 이내 거리에 놓여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에 고여있던 물이 바지를 넘어 엉덩이에 그대로 닿았다. 신경 쓰지 않고 멍하니 거리를 쳐다봤다. 비는 점차 거세지더니 곧 거리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내쫓았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곧 거리가 텅 비었다. 소란스럽지 않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적막 속에서 빗소리만이 구슬피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준의 귀에 구두 소리가 들렸다. 웅덩이를 밟아 찰박거리는 구두 소리. 누군가 도준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곧 도준의 시야에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구두는 비가 오는 날임에도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봤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도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남자. 그럼에도 옷에 비 한 방울 닿지 않은 사람.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헛것이 보일 만도 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쓰러진 건가'

헛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자신이 쓰러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 이 기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애석하지만 현실이야."

도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말했다. 도준이 놀라 남자를 쳐다봤다.

"일단 일어나지?"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도준은 대답 대신 다시 거리를 쳐다봤다. 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도준에게 미련이 없다는 듯 다시 가던 길을 가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네 기억 지우고 싶지 않아?"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냐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남자의 말에 도준의 동공이 흔들렸다.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서서히 도준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준의 생각을 읽은 사람이었다. 비가 이렇게 거센 날 우산도 없이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 저 남자를 놓치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꽤나 거리가 벌어진 남자를 향해 냅다 뛰었다. 숨이 가빠왔다. 오랜만에 가쁜 호흡을 내쉬어서일까. 아니면 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을까. 도준의 걸음이 가벼웠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지금의 기억저장소였다. 'ㅁ'자 형태의 한옥. 인테리어는 지금과 조금 달랐으나, 한옥의 고풍스러운 느낌은 여전했다. 도준이 툇마루에 옆에 서서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툭'

도준은 어디선가 날아드는 물체를 본능적으로 잡았다. 수건이었다.

"욕실은 맞은편. 씻고 와. 얘기는 그다음."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자는 다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처음 본 남자가 다짜고짜 어딘가로 데려왔다. 그것도 모자라 먼저 씻고 오라니. 첫 만남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물론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도 믿을 만큼 도준은 간절했다. 남자가 건네 준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하얀색 내부와 잘 정리된 물건들이 남자의 깔끔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에 젖은 옷을 벗고 물을 틀어 몸에 끼얹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비에 젖어 경직되어있던 몸이 차츰 풀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가려는 도준 앞에 새 옷이 놓여있었다. 놓인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남자를 찾았다. 식탁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통유리를 통해 보였다. 도준은 머쓱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앉아."

남자는 도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도준이 머쓱하게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셔. 몸이 좀 풀릴 거야."

도준의 앞에 김이 나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도준에게 중요한 건 커피 따위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기억 지우고 싶나?"

"네"

기다렸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면 잊혀도 상관없는 걸까?"

도준을 만나고 남자의 입에서 처음 질문이 나왔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면, 그래서 잊을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도준은 남자가 이유를 물을 것에 대비해 이것저것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따라와"

남자는 도준을 기억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높은 천장과 널찍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도준을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여기서 네가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어. 벽장에 있는 구슬들 보이지? 그건 너 같은 손님들의 기억이 담긴 구슬이야. 기억을 내게 넘기기로 한 손님들의 것이지."

남자의 말처럼 벽장에는 수많은 기억구슬이 놓여 있었다.

"제안을 하나 하지. 기억을 지워준다면, 나 대신 이곳을 관리해. 너 같은 손님들을 상대하는 거야. 기억을 지우고 싶어 찾아오는 손님에게 커피 한 잔 내어주고, 기억을 지워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갑작스러운 남자의 제안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도준에게 더 급한 건 지금도 도준을 괴롭히는 이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손님은 어떻게 데려오죠?"

"손님은 내가 보낼 거야. 하루에 한 명. 이곳은 일반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하겠습니다."

도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기억을 모두 지운 도준은 전보다 훨씬 가뿐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때. 이제 좀 괜찮나?"

"이거 진짜 신기하네요. 당신을 만난 것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정작 저를 제일 괴롭혔던 기억은 나지 않아요."

"보통은 여기 온 것도, 자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해. 너는 이곳을 관리해야 하니까 특별히 놔둔 거라고."

남자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갈색과 빨간색이 섞인 구슬이 놓여 있었다.

"그게 제 기억인가요?"

"맞아. 기억을 지우면 기억이 구슬 형태로 나오게 돼. 기억들은 모두 벽장에 보관되고."

"아 그럼 제 기억도 여기 어딘가에 보관되겠네요."

도준이 자신의 기억구슬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네 기억은 내가 가지고 갈 거야. 미리 말했다시피 이 기억은 이제 네게 아니야. 내거지."

"아.."

아쉬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도준을 감쌌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기억에서 해방됐다는 안도감이 컸다.

"여기 있는 기억들은 모두 들여다봐도 된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야. 이 기억들을 보고 싶으면 봐도 된다고. 보는 방법은 간단해. 커피를 내리는 것처럼 구슬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끝. 에서 추출된 커피를 마시면 자연스레 그 기억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주의사항 같은 게 있나요? 기억 속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안 된다던지.."

"너는 기억 속에서 투명 인간에 불과해. 네가 어떤 짓을 해도 기억이 바뀌지는 않으니 걱정 마. 그저 다시 잘 넣어놓기만 해."

남자는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 그 뒤를 도준이 따라갔다.

"이제 가볼게.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이렇게 바로 가신다고요? 뭐 물어볼게 생기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요? 연락은 어떻게 하?"

도준의 그 말에 남자가 큰소리로 웃었다.

"이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무슨. 필요하다 싶으면 내가 올 거야."

"그럼 이름이라도.."

" M. 여기 오던 손님들은 잠시나마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M은 그렇게 작별 아닌 작별인사를 남기고 문을 넘어 사라졌다. 혼자 남은 공간에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기억은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네. 아까는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만 들어가죠. 슬슬 배가 고프네요."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서윤은 쭈뼛대며 제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도준이 피식 웃으며 어깨너머로 말했다.

"빨리 와요. 앞으로 저녁 당번은 서윤씨니까."

도준의 한마디에 서윤이 웃으며 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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