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Apr 29. 2022

[기억저장소] #6. 여행

불편할 줄만 알았던 서윤과의 생활은 생각한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둘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잘 맞았다.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나, 아침을 먹고 멍하니 앉아 사색을 즐기는 것도 비슷했다. 덕분에 둘은 한 달이 넘도록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었다. 손님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 서윤은 손님이 오면 가볍게 인사만 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준과의 문제를 애초에 만들지 않기 위한 서윤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도준은 그런 서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손님들의 기억을 지워줬다. 하지만 왜인지 손님이 떠나고 나면 둘 사이에 어색한 감정이 았다.

"오늘은 손님이 안 오려나 보네요."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을 쳐다보며 도준이 말했다.

"손님이 안 와요? 그럴 수도 있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긴 한데, 가끔씩 있어요."

"늦는 거 아닐까요?"

"이곳에 늦은 손님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애초에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서윤씨가 특별한 거지."

서윤 어깨가 올라갔다. 마치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듯 으쓱대는 탓에 도준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오늘은 서윤씨 기억을 찾아볼까요?"

"제 기억 찾을 수 있어요?"

서윤이 흥분하며 도준에게 물었다.

"저도 그건 몰라요. 이런 적이 없다 보니 그냥 해보는 거죠."

도준은 말을 마치고 서윤과 함께 기억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번 사건 이후 처음 들어오는 방이었다.

"뭐 기억나는 거 있어요?"

"기억나는 거요?"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거요. 장소라던지, 사람이라던지. 기억나는 건 전부요."

도준의 말에 서윤이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써봤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도준 풀 죽은 서윤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될 거라고 생각도 안 했고."

말을 끝낸 도준이 벽장을 돌아다니며 구슬을 찾기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답답했다. 어떤 구슬을 꺼내야 할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건 뭐예요?"

서윤이 방 한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액자에는 세계지도가 들어있었고 위에는 티켓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제가 가본 곳들이에요."

도준의 말에 서윤이 놀라 눈이 커졌다.

"여기를 전부 다요? 맨날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뭐 어떻게 보면 직접 갔다 온 건 아니고, 손님들 기억을 통해서 다녀온거죠."

"기억을 통해서 간다고요?"

"네. 여기 이 구슬들은 모두 손님들의 잊고 싶은 기억이에요. 난 일 이 기억들에 들어가 그곳을 돌아다녀요. 언제는 외국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또 언제는 도심으로."

서윤이 부러운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비슷한 기억을 보여주려고."

"저한테 보여준다고요?"

"네. 그래야 기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서윤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서윤의 밝았단 얼굴이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도준은 벽장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서윤에게 다가갔다.

"그럼 일단 이 기억으로.."

"아! 생각났다!"

서윤의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놀라 도준이 멀뚱멀뚱 서윤을 쳐다봤다.

"이거!"

서윤이 가리킨 곳에는 기차표가 하나 붙어있었다. 스위스행 기차표였다.

"이게 뭐요?"

"생각났어요! 기억 속에서 저 기차표를 가지고 있던 게 생각났어요. 차 안이었고, 조수석에 타서 표를 보고 있었어요!"

서윤이 흥분하며 말했다.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요?"

서윤은 애써 잡은 기억의 흔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서윤이 대답했다.

"스위스... 스위스 인터라켄!"

서윤이 말함과 동시에 도준이 사다리를 끌고 벽장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꽤나 높이 올라가더니 곧 구슬 하나와 함께 밑으로 내려왔다. 도준의 손에 옥빛 구슬이 들려있었다. 도준과 서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옥빛의 강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강 옆엔 푸른 나무들이 나란히 서있었고,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창한 숲이 보였다. 넓게 깔린 초록색의 잔디 위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끔씩 버스가 지나다닐 뿐, 붐비지 않았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기억에서 봤다는 곳이요. 스위스 인터라켄."

서윤이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앞장섰다.

"여기가 기억 속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풀냄새도 느껴지고, 바람이 얼굴에 닿는 느낌도, 매섭게 흐르는 강물 소리도 다 들리는데.. 진짜 기억 속 맞아요?"

서윤이 신기한 듯 재차 물었다.

"맞아요. 지금 느껴지는 모든 것들은 기억자가 실제로 느꼈던 것들이에요. 서윤씨가 말한 바람도, 냄새도, 촉감도. 기억자가 모두 느꼈던 것들이죠."

"신기하네요. 그나저나 얼마나 안 좋은 기억이길래 지운 거예요? 이렇게 멋진 기억을."

서윤의 말에 도준이 두리번거리더니 곧 한쪽을 가리켰다. 도준의 손 끝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함께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든 수영복이 보였다. 아마도 근처 호숫가로 수영을 하러 가는 듯했다.

"저 두 사람의 기억이에요?"

"두 사람 중 한 명의 기억이죠."

"왜 지운 거래요? 혹시 친구가 죽은 건가.."

서윤이 말끝을 흐렸다.

"아뇨. 둘 다 아직 살아있어요. 불과 1년도 안된 기억이거든요."

서윤이 놀라 도준을 쳐다봤다.

"조금 있으면 둘 사이에 말다툼이 생길 거예요. 꽤나 큰 싸움이 될 거고."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기억을 지우러 왔다고요?"

"난 기억저장소에 온 모든 사람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온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한테는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당사자들한테는 끔찍한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요."

도준의 말에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가만히 서서 쳐다볼 뿐이었다. 도준은 서윤의 어깨를 잡아 뒤로 돌려세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기억보다 중요한 게 있죠. 서윤씨의 기억을 찾는 것."

서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등지고 걸어갔다. 옥빛 강물이 흐르는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 뒤에서 예견된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터라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윤과 도준은 기억을 찾아 헤맸다. 옥색의 물이 가득한 호수에 가보기도, 시계 파는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선 마을 중심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서윤의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서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애초에 바로 기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단서라도 찾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망하지 마요. 오늘 겨우 첫 번째 시도였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찾다 보면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도준의 말에 서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제 갈까요?"

말을 마친 도준이 허공에 손을 뻗어 기억의 경계를 찾기 시작했다. 곧 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이 손에 잡혔다. 도준은 어리둥절해하는 서윤의 손을 잡고 경계 너머로 사라졌다.

"기억에서 나올 때 이렇게 나오는 거였어요? 엄청 신기해!"

지칠 대로 지친 도준과는 반대로 서윤은 기억 속을 돌아다닌 것이 믿기지 않다는 듯 한껏 흥분해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배고파 죽겠어요."

옥빛 구슬을 다시 제자리에 올려두고 도준과 서윤은 기억의 방을 나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가는 중에도 서윤은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처 놀이공원을 다녀온 꼬마처럼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다음엔 어떤 기억을 볼 거예요?"

"글쎄요. 서윤씨 기억을 따라가야겠죠?"

"재밌겠다."

"오늘은 일단 쉬어요. 기억을 보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를 쓰는 일이라 피곤할 거예요."

서윤은 먼저 씻겠다는 말을 한 뒤 건물로 들어갔다. 도준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윤의 말소리가 사라지니 기억저장소는 다시 예전 모습을 찾은 듯 고요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오랜만의 고요함이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만큼은 평화로웠다. 서윤이 나오기 전 밥을 차려놓기 위해 짧은 휴식을 끝내고 툇마루에서 일어났다.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올 시간이 아님에도 갑자기 열리는 문에 도준이 놀라 그곳을 쳐다봤다. 소리가 난 곳에는 나이가 지긋이 든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저장소] #5. 과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