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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6. 2022

[기억저장소] #1. 기억의 방

'끼익'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문이 특유의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는 쭈뼛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한옥으로 꾸며진 작은 공간. 'ㅁ'자 형태로 지어진 한옥의 외관은 열고 들어온 문 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였다. 한옥의 중심은 마당이었다. 마당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꼿꼿이 서있었고, 제각각의 크기를 가진 돌이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오래되어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한옥 내부는 깔끔했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하얀색 인테리어와 소품이 제법 잘 어울렸다.

"계세요?"

여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대답 대신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소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마당에 가득했다. 여자의 표정이 이내 실망으로 변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기억을 지워주는 곳이라니. 역시 누군가 보낸 장난문자였을 것이다. 여자는 체념한 듯 돌아온 낡은 문으로 향했다. 낡은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지우러 오셨나요?"

소리가 난 곳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흰티에 셔츠를 걸친 깔끔한 복장. 한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있었다.

"기억을 지우러 오신게 아닌가요?"

재차 묻는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문자를 받고 왔는데요.."

"들어오시죠"

남자는 짤막한 말과 함께 여자를 자리로 안내했다. 현대식으로 인테리어된 부가 한옥과 잘 어울렸다. 남자는 여자를 자리에 앉혀놓고 말없이 한쪽으로 걸어갔다. 언뜻보기에도 많아보이는 커피머신들. 남자는 핸드드립 머신을 꺼내더니 이내 익숙한 듯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집 안이 온통 고소한 냄새로 가득찼다. 남자는 여자 앞에 방금 내린 한 잔의 커피를 내려놓았다.

"드셔보세요. 맛이 좋을겁니다."

잠시 경계하다 이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남자의 말처럼 커피는 맛있었다. 푹신한 크레마 뒤로 원두의 고소함이 그대로 전달됐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느껴졌다. 커피잔에 있는 커피가 반쯤 사라질 때까지도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자는 도도하게 다리를 꼰채 자신의 커피를 홀짝대고 있을 뿐이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게 사실인가요?"

색한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여자였다.

"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아무리 찾아봐도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던데요."

남자는 말없이 웃음 짓더니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여자에게 말했다.

"어떤 삶에도 마법 같은 순간이 한 번씩은 생기기도 하죠."

"그럼 제 기억도 지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돈을 내면 되나요?"

여자는 다급한 듯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런 여자와는 반대로 남자는 차분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어떤..."

"저는 기억이 한 잔의 커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그 향과 맛이 강렬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커피가 차갑게 식어버린 다음에는 향도, 맛도 모두 떨어지거든요. 같은 커피인데도 말이에요.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아주 강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죠."

알 수 없는 말에 여자는 그저 멀뚱멀뚱 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느낄 수만 있으면 됩니다. 기억을 지우러 오신 거라면 바로 지워드릴 수 있습니다만, 한 가지는 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뭐죠?"

"지워드린 기억은 지금 이 시간부로 제 소유의 기억입니다. 다시 돌려받을 수도, 다시 생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자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했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기억을 지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게요."

남자는 여자의 말에 미소를 머금더니 오래된 원목 테이블에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는 나지막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볼까요. 그토록 지우고 싶은 그 기억."


여자는 남자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10평쯤 되어 보이는 작은 방이었다. 방 문은 얼마나 작은지 고개를 약간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기대없이 방으로 들어간 여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평쯤 되어보이던 방  100평넘어보였고,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높게 뻗어있었다.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들 그런 반응이었습니다."

남자는 익숙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어디죠?"

"기억이 저장된 곳입니다. 손님처럼 기억을 지우러 오신 손님들이 오는 방이죠. 딱히 부르는 이름은 없지만, 몇몇 분들은 기억의 방이라고 부르시더군요."

기억의 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방의 구조는 단순했다. 방 가운데 안마의자 같 커다란 의자 한 개가 놓여져있었고, 주변 벽은 모두 장으로 둘러쌓여있었다. 장에는 작은 구슬들이 빼곡히 차있었다. 모양과 크기는 모두 같았으나, 색은 제각각이었다. 남자는 익숙한 듯 여자를 가운데 있는 의자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자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의자의 각도, 푹신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기억을 지우려면 몸이 편해야하거든요."

"네.."

"이제부터 손님의 기억을 들여다볼겁니다. 손님이 하실 일이라고는 그저 편하게 앉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겁니다."

여자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남자는 무언가 알고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잠시도 떠올리기 싫을만큼 안좋은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후 앞으로 이 기억은 손님을 절대 괴롭힐 수 없을 니다. 그렇다면 나름 좋은 투자가 아닐까요?"

남자 웃으며 했다. 떠올리기 싫어 억지로 참아내도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 때문에 이곳 찾아온 여자였다. 기억을 지우지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시간 이후로 이 기억은 제 소유가 됩니다. 다시 기억하고 싶다고해도 어떤 기억인지 생각나지 않으실겁니다."

"기억에서 지워졌는데 다시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요?"

"가끔 어디선가 느꼈던 것 같고, 이미 본 장면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으시겠죠?"

"네."

"데자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그건 지워진 기억의 흔적입니다. 우리 뇌는 어떤 순간의 냄새나 특별한 촉감 같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찾아내려고 합니다. 다만, 찾지 못할 뿐이죠."

"어쨌든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거네요?"

"맞습니다."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눈을 감았다. 여자는 남자가 주는 신호에 맞춰 천천히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편안한 의자 덕분인지 여자는 금세 자신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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