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래수면시 (風:바람 풍 來:올 래 水:물 수 面:낯 면 時:때 시)
: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바람과 물이라는 서로 전혀 다른 두 물질이 만나 어떠한 파동을 만든다. 우리의 삶도, 이 하루도, 서로 다른 어떤 두 개가 만나 생기는 파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파동은 내가 오늘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접할 때 내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것들이다. 내가 오늘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지고, 또 누군가를 만날 때, 내 깊은 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 그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나 어느 하루가 완성된다.
2024년 12월 20일. 나의 이 하루를 만든 이 파동들은 참으로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한 순간 한 순간을 되새기며 기록을 해본다. 먼저, 이날 내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간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쓴 일기를 이곳에 옮겨 적어본다.
2024.12.20 정오.
새벽에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다. 사실, 돈을 쓰는 게 두려웠다. 돈이 없지는 않지만 일을 구하지 못하고 있어서인지, 요즘 난 절약에 온 신경이 기울어져 있다. '내가 혼자 정성껏 해 먹으면 되지!' 싶기도 했다. 그냥 돈을 안 쓸 핑계랄까.. 근데 새벽 운동을 하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긴 고민 끝에 바뀌었다기보다는 딱 하나의 생각을 하자마자 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경험이지. 오늘만 누릴 수 있는 진귀한 경험.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여행인 걸. 돈이야 뭐. 내가 2만 원, 3만 원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잖아!(이날, 내가 간 식당은 최근에 문을 닫았다가 약 두 달 만에 이번 금, 토만 여는 곳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 중 하나이다.)' 그렇게 난 한 시간을 달려 이곳에 왔다.
이곳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오랜만에 어린 왕자 원서 책을 꺼냈다. 형광펜으로 모르는 단어를 줄 그으면서까지, 지하철이지만 조금은 유난스럽게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옆자리가 비었고, 낯설지 않은 외국어가 들렸다. 프랑스인인 여자 아이와 그녀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은 것이다!! 어찌 이런 우연이. 난 사전으로 "en baîllant"이라는 불어 표현의 뜻을 찾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본 아이 엄마가 기특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 "'en baîllant', c'est..('en baîllant이라는 것의 뜻은 말이야..)"라고 하며 하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 불어로 "en baîllant"은 '하품하며'라는 뜻을 가진 표현이다. 덕분에 이 표현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때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이 꽤나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그 모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퍽 기분이 좋았다. 내가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그런데, 내가 지금 불어를 하고 있어서 기쁜 것보다, 자신의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 여자 아이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 똘망똘망한 눈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엄마 왜 지하철에 티브이(스크린)가 나와? (화재 시 행동요령 영상을 보며) 저기서 왜 불이 나고 있어? 왜 안내방송에 영어가 나와?" 등등이었다. 내가 불어를 잘 알아들은 것이 맞다면 말이다. 그 수많은 질문에 아이 엄마는 하나하나 정성스레 답을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안 지어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내렸다. 내리면서 나에게 어찌나 상큼 발랄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Au revoir!(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던지. 고마웠고, 기뻤고, 나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오늘이라는 여행의 시작이 참 좋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만나는 큔의 요리가 너무나 기다려진다 :)
- 일기 끝 -
노트를 덮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식사가 나왔다. 한 접시에 여러 요리가 참 다정히도, 가득 올라가 있었다. 또 그 각각의 맛은 어찌나 놀랍던지. 마음이 경건해지고 한입 한입이 소중해졌다. 이곳에 오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은 내가 기특했다. 웨이팅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음미하여 행복을 만끽했다.
내가 이날 방문한 식당인 '큔'은 종로구 자하문로, 청와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채로 나온 나는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의 길을 걸었다. 왼편에서는 웅장하고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고 오른편에는 곱디고운 기와가 얹어진 담벼락이 이어졌다. 친구가 이전에 줬던 라이언 손난로를 장갑 속에 넣어 꼭 쥐고 걸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이 동그란 것이 손난로이자 '마음난로'의 역할도 해주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삼청동이라는 동네에 왔다. 멋진 갤러리들, 편집샵들 그리고 카페들이 가득 늘어서 있다. 보통 같으면 잘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한 편집샵이 나를 이끌었다. 삼청동이라는 동네를, 그 편집샵 건물을, 그리고 그 안의 마네킹에 걸쳐진 옷과 장신구를 고려해 보았을 때, 나는 여태까지 사 본 적도, 입어본 적도, 그리고 살 생각도 없는 그런 비싼 물건들이 가득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구경은 되는 거잖아! 나의 발길이 그 편집샵으로 향했다. 내가 다소 어색해하며 들어갔을 때, 다른 손님들은 없었고 마치 연예인 같이 멋진 여자분이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 멋진 여자분, 그리고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더 고급스러운 옷들이 가득한 내부를 본 순간, 나는 "여기 잘못 들어왔나.. 그냥 나갈까.." 싶었다. '시골 감성'의 스타일을 추구하고, 학생의 티가 가득한, 화장기도 하나 없는 나였기 때문이다. 몇 초간의 쭈뼛쭈뼛. 그런데 그 여자분이 나에게 웃으며 다가와 그 쭈뼛함을 너무나도 상냥하게 깨어주었다. 그녀는 이것저것을 나에게 물어보며 브랜드의 브로셔까지 들고 와서 설명을 해주셨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스타일도 있으니 구경하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그렇게 난 조심스레 몇 가지의 옷을 보며 슬쩍 가격표도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숫자에 잠시 당황하기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우와.. 정말 멋지고 예쁘네요."였다. 정말이지 내가 최근에 본 옷들 중에 가장 멋지고 예뻤으며 부드러웠다. 이전에 백화점이나 다른 샵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면 다소 주눅이 들고 마음 한편에서 씁쓸함이 몰려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날 이 순간의 감정은 신기하게도 퍽이나 괜찮았다. 그저 자신의 브랜드에 대한 애정을 가득 가진 채로 신나게, 그리고 친절히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게다가 피팅도 가능하다고까지 해주는 그 여자분과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녀는 참 멋졌고, 또 그녀에게 참 고마웠다. 이곳은 김인태 디자이너의 '김해김'이라는 브랜드의 쇼룸이었다. 이 브랜드는 커다란 리본이 올라간 구두로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이 구두는 여러 색상이 있는데, 그중 하얀색은 웨딩슈즈로도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난 그곳에서 그 여자분과 약속했다. "저 결혼할 때는 저 슈즈를 신어야겠어요!" 그렇게 난 애인도 없지만 웨딩슈즈를 결정하고 꽤나 신나는 발걸음으로 그 매장에서 나왔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할 때 이 브랜드의 웨딩슈즈를 꼭 신을 테다!
이 주변이라면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 관람을 참 좋아한다. 여백이 가득한 하얀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회화 작품과 조형물을 감상하는 것. 그것에 담긴 의미와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해도 그저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는 한다.
종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거의 항상 3~4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그 전부를 관람할 수 있는 티켓도 있지만, 나는 주로 그중에 하나만 골라 그 전시만을 위한 티켓을 구매한다. 하나의 전시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것도 꽤나 큰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이번에는 그중에 이강소 작가님의 "풍래수면시"라는 전시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재 전시 중에서는 나의 취향에 제일 가까워 보였을 뿐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골목이 참 많았다. 호기심에 여기저기 들어가다가 막다른 길을 만나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몇 차례 와봤던 이 익숙한 미술관에 도착한 후에도 내부에서 길을 잃었다. 좀처럼 가지 않는 기념품 점을 먼저 들러 10분가량이나 구경을 했다. 그렇게 평소보다 꽤나 긴 탐방을 하다가 드디어 전시관에 들어섰다. 그때의 시간은 오후 1시 50분 즈음. 그런데 마치 내가 이것을 위해 일부로 이 시간에 맞춰온 것 마냥, 내가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계시던 도슨트님께서 2시부터 설명을 시작한다고 방송을 하셨다. 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본 적도, 또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였다. 그저 '오호! 이런 것도 있네?'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설명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10분가량이 흐르고 2시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10분 만에 '흠.. 뭔지 잘 모르겠군.'이라 생각하며 나머지 작품들을 대강 둘러본 후 나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다소 빨라진 발걸음으로 지나가려는데, 도슨트 선생님 주변에 몇 사람이 모여 설명을 듣고 있길래 '그래. 시간도 있겠다, 조금만 들어봐야지.' 하고 멈추었다. 그리고 난 40분 동안 그 설명에 푹 빠져들어 전시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조금 전 '이 그림이 뭐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작품들에 깃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의 '풍래수면시'. 서로 다른 두 개가 만나 생기는 파동. 나, 그리고 네가 새로운 것을 만나 생기는 인식에 대한 작가의 질문을 가득 담은 전시였다.
단 40분 만에 그 작가의 삶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세세히 알지는 못함이 당연하지만, 나는 이 시간 동안 그의 세상에 잠시 들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와 친해졌다. 이를 가능하게 해 주신 도슨트 선생님께 참 고마웠다.
온 마음을 다해 집중을 했었던 것일까. 미술관에서 나오니 난 급격히 피곤해졌다. 뿌듯함과 기쁨이 깃든 피곤함이랄까. 이제 이 기쁜 마음을 안고 집에 갈 시간이다! 만보가 넘도록 걸었어서 다리가 꽤나 아팠고 지하철에는 자리가 없었지만, 퍽 괜찮았다. 몸도 마음도. 아니, 둘 다 참 가벼웠다. 오늘을 차근차근 되돌아보며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