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악몽
발가벗고 대로변에서 춤추고 싶은 이 기분
나는
IMF가 터지고 부모님은 길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늦은 밤 큰 고무다라에 섞인 달콤한 반죽은 다음 날이면 붕어빵이 되어 사람들의 품 속에 따뜻하게 안겼지만 우리 집까지 온기를 가져다 주진 않았다. 시린 마음을 여미듯 꼬치에 오뎅을 기웠다. 떡볶이도 팔고 닭꼬치도 팔았다. 나는 떡볶이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공중전화부스 안에 기대 서 있던 아버지의 마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속도로 위 차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낮은 체념이 오갔다. 쓰러져 있는 동생들 속에서 나는 잠이 든 어린아이 얼굴을 했다. 그땐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버지 고향인 섬으로 떠나 꽤 오래 뭍으로 나오지 않았다.
생계로 바빴던 부모님은 짐승같이 자라던 나와 동생들을 조부모님 손에 맡겼다.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었다. 작은 탁상 앞에서 할아버지가 술을 한 잔 드시면 나는 배나 생무를 한 조각 먹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집안과 밖으로 술병을 숨겨두셨는데 나는 그곳을 잘 기억했다가 몰래 할아버지에게 알려드리곤 했다. 해적이 보물상자를 발견하듯 우리는 진로를 찾았다. 감나무 아래, 소여물 통 아래, 아래 비닐하우스 문 뒤 망태기 안, 할머니가 어디에 술을 숨겼는지 알려드리면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내가 최고라고 하셨다. 만선의 어부였던 할아버지와 나는 멋진 육지의 해적단이었다. 흥이 오르면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로 할아버지의 18번 ‘청춘을 돌려다오’를 몇 번이고 되감아 들었고 할머니는 성을 내며 집 밖으로 나가셨다. 기분이 좋은 날 말미에는 한 번씩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놈이 장손이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로 밭일을 하셨다. 포도, 고추, 옥수수, 배추, 고구마, 파, 상추, 깻잎 등. 나는 가끔 포도를 여물게 하는 봉투를 가져다 나르거나 수확이 끝나 뽑힌 고춧대를 모으는 자질구레한 일을 거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기집애라 아쉽다고 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 많이 더 무거운 짐을 들었다.
주에 1번씩 시외에서 과외 선생님이 왔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텃밭에 뭔가 키워보려고 검정비닐을 구매했는데 너무 크고 쓸 수가 없어 누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라고 했다. 고추인지 고구마인지 할아버지가 땅에 검정 비닐봉지를 뒤집어씌우는 일을 하셨던 게 기억이나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차 뒷자리에 비스듬히 있는 농업용 비닐봉지는 높이가 2.5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내 키보다 훨씬 더 큰 이 비닐 롤을 어떻게 들고 갈 것인가. 무게는 생각보다 들만했고, 높이가 문제였다. 굴리자니 찢어져서 소용이 없을 텐데, 일단 오른쪽 발 위로 올려 세웠다. 한 걸음씩 조심히 걸어보니 할만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100m 이내의 거리였다. 집에 가까이 다다랐을 때 할아버지가 때마침 밖으로 나오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어이구 소리와 함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그날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꺼내셨다. 어린놈이 어떻게 그걸 가지고 올 생각을 했는지 보통 애들 같으면 무겁고 귀찮은 걸 들고 올 생각도 안 할 텐데, 그걸 지 혼자 안고 왔다니까. 웬만한 놈들보다 낫지. 암, 아주 기특해. 집에 보탬이 될 것 같단 생각을 누가 하느냐고, 사내새끼였으면 무슨 일이든 하나 했을 거야.
섬엔 아픈 사람이 생기면 뭍으로 올라가야 한다.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된다면 육지에 사는 가족·친지 누군가가 간호하게 된다. 이 전에는 주로 고모가 그 역할을 도맡아서 했지만, 그 업은 나에게로 승계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 국립암센터에 잠시 계셨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대학 입시 기간이라 시간이 여유로웠다. 약 한 달 정도 병원에 있었는데 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겠지만, 색전술로 위에 구멍이 나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기력이 없으셨다. 지금에야 잠깐이라도 할아버지를 씻겨드릴 수 있고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던 사실이 감사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엔 아직 어린 학생이 치료 과정 중 말라버린 할아버지 옆에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일이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 중 운이 좋게 내가 시간이 맞았던 것일 뿐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가까이 못 있을 뿐이지 그들의 사랑과 희망이 나보다 적었을 리가 없다. 할머니를 포함한 모두가 나를 대견해하며 아쉬워했다. 네가 남자였다면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라고.
나는 오래 그리고 많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사랑했다. 그들에게 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의젓하고,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다 보면 그냥 나로서도 괜찮아지지 않을까.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좀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의 눈에 언제나 나는 아쉬운 아이였다. 항상 최고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남자가 될 수 없었다. 한때 나는 정말 간절하게 남자가 되고 싶었다. 가슴이 보기 싫어 가슴 절제 수술을 꽤 진지하게 고려했다. 꽤 오랜 시간 ‘남자’라는 말에 예민하고 미워하면서 동경했다. ‘여자’ 같다는 것은 욕처럼 들렸고, 나 역시 폄하하거나 조롱의 의미로 사용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그는 산에서 작은 풀꽃을 꺾어다가 탁상 위 물컵에 꽂아 놓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린 시절 독학으로 영어를 가볍게 할 줄 알았고,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필요한 물건은 두 개의 창고와 마당에서 몇 번 두드리면 만들어내었고, 아궁이 앞에서 새벽엔 조기를 저녁엔 고구마나 감자 등을 구워주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지만 할머니와 시장을 가면 반걸음 뒤에서 뒷짐을 지고 검정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다니셨다. 고되게 일한 날은 푹 쉬었고, 여유로운 날엔 ‘앗싸라, 앗싸랄하게 살아야 한다’라며 술과 음악을 슬프게 즐겼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기억을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내가 나의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과 함께 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와 닮지 못한 내가 미웠다. 영원히 그와 닮지 못할 내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