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이미지를 내포한 글자
질감이 다른 하늘과
공기 속 베어 든 이질적인 향들과
벽면을 타고 이어지는 낯선 컬러코드
시선을 멈추게 하는 타일 속 기이한 문양
알 수 없는 소리들의 웅성거림
그림처럼 다가오는 글자 풍경들
당장 주문하고 싶은 형형색색 샐러드처럼
다채로움과 신선함이
한 데 담겨질 때면
온몸에 퍼지는 이국적 감성,,
이것을 저는 중독성이 그리 강하다는
여행 바이러스라 정의해보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녀석
외국 여행 중에 생소함과 이질적인 울렁임을 첨가하고서는
요상한 교감을 하자고 손 내미는 것은
그저 제 눈엔 상형문자로 다가오는 외국어 간판들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여행할 때면
그 신기한 세계를 담고 있는 레터 이미지로 인해
이국을 향한 호기심 지수는 맥스치로 올라가니까요.
타이포그래피는 단순한 글자의 배열을 넘어,
감성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문자 퍼즐을 해독하는 일은 신호도 없이 불쑥 들어와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마구 자극을 하죠. 그나마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음이라도 소리 내며 읽어 볼 수 있다면 뜻은 모를지언정 저의 이성은 조금 안도를 하게 됩니다. 꼬불꼬불 문자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언어 앞에 서면 그 형태와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경험해 보려 애쓰는 감성만 무척 바빠지구요. 그런 바쁨이 괜스레 싫지 않습니다.
유니크한 타이포그래피를 마주할 때마다 그 나라만의 스타일과 기법이 깃든 독특한 감성을 탐구하게 됩니다. 복잡하고 장식적인 디자인은 특정 문화나 시대의 감성을 반영할 수도 있으니까요.
VN TYPEFACE
그중에서도 우선 제가 살고 있는 베트남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겠지요. 6 성조를 성실히 표기하느라 베트남어의 라틴 알파벳은 장신구를 갈아끼기에 바쁩니다. 발음 부호(다이어크리틱, Diacritics)의 활용이 돋보이는 성조 언어입니다. 6개의 성조를 구별하기 위해 다양한 발음 부호(악센트 기호)를 사용합니다. 장식적 요소가 가미된 세리프체(serif typeface)에서도 고딕 문자인 산세리프(sans-serif)체에서도 6 성조의 마크들은 모음 위에서 일어나는 최대 17개의 결합 변수를 일으키며 베트남어 만의 자태를 뽐내기 위해 쉴 틈이 없습니다. 슈퍼 비지 타이포그래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트로
주로 베트남에서 굵직하게 느끼는 타이포그래피의 전반적 이미지는 레트로틱입니다. 레트로 타이포그래피는 과거의 디자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감성을 창출하는데, 시대적 감각을 현대적 감성과 믹스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알파벳 디자인 그 자체보다는 주로 때 묻고 녹슨 러스틱 한 간판의 외면이 주는 느낌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독 낡은 듯 신선하고, 정이든 듯 감각적인 느낌을 줍니다.
천년 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어는 한자(字喃, Chữ Nôm)를 사용하다가 17세기부터 로마자 기반의 꾸옥응으(Quốc Ngữ) 표기 방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아직도 베트남어는 한자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글과 동일하게 표기는 한자로 하지 않는 것이 표준이나 실사용 단어의 다수는 한자어 뜻을 내포합니다. 가끔 한자가 포함된 간판들도 종종 눈에 띄는데 여기는 중국인가 하게 되기도 한답니다. 같은 듯 다르게 섞여 있는 아시아의 풍경이 또 그것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가장 가독성이 좋은 하노이 조간신문들이 예쁘게 걸려 있는 곳입니다. 신문보다 모델에게 시선이 더 많이 가는 것이 단점이지만요.
낡은 나무판 위에 정성 들여 쓰고 색을 입힌 상점의 이름은 해를 더해갈수록 시간의 깊이를 담습니다.
베트남어는 발음 부호를 글자 위아래에 표기해야 하므로 알파벳의 상하 공간을 다양한 간격으로 많이 차지하게 됩니다. 하여 일반적인 영어용 폰트는 대부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부 글로벌 폰트(Arial, Times New Roman 등)는 베트남어를 지원하지만, 고유한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베트남어 전용 폰트를 사용하게 됩니다. 가만히 간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간(Kerning)과 행간(Leading)의 공간이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베트남 타이포그래피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이 되는 것일 겁니다.
정감 어린 추억과 시간이 함께 돌아가는 선풍기 상점의 간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상점의 간판처럼 이탤릭체와 셰리프 체가 조화를 이룰 때 가장 베트남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단 느낌이 듭니다. 심지어 이 작은 간판 속에는 산셰리프 고딕체까지 삼합을 이루고 있어요. 가독성을 높여 광고력을 더하기 위한 간판 제작자의 고심이 느껴집니다.
'보이나요?
나무와 잎사귀는 웃고 있는데
나는 왜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고 있나요…'
카페 어느 한 구석에 달려있는 문구입니다.
글의 의미가 내포하는 힘은 두말할 것 없이 강력하지만 때로는 뜻을 몰라도 어렴풋한 아련한 느낌은 글자의 형상을 타고 흐릅니다. 미처 뜻을 해석해 보기 전에도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이방인의 이심전심
Photographer – Sculptor – Film Maker
로로 자자르는
포토그래퍼-조각가-영화 제작자라는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프랑스 예술가입니다.
프랑스와는 인연이 깊은 베트남은 프랑스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또 프랑스 예술가들과의 문화 공연 교류도 꽤 많습니다.
로로 자자르는 여행자의 시선, 외국인의 시선으로 하노이 거리의 모든 레터링들을 사진으로 남겨 콜라주 한 뒤 한 작품으로 엮어 '하노이 캘린더'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곳곳의 하노이 벽은
외국인의 시선에는 매일 다르게 사로잡히는 매력적인 날들로 경험되고 기록되었을 테니까요.
하노이 거리를 걷다 보면 유난히도 벽면에 잉크로 스텐실 된 광고 전화번호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저 정보 나눔의 수단으로 인식되겠지만,
외국인의 시선에는 숫자 타이포 그래피로 붓질을 한 어떤 예술적 스팟처럼 느껴집니다.
로로 자자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약 10년 동안, 그는 램프 또는 발광 물체의 설계 및 제작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금속, 플렉시글라스, 초현실적인 램프 디자인에 집중합니다. 전화 번호가 가득한 스팟을 가져와 플렉시글라스에 인쇄하여 독특하고 독창적인 램프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솔직히 이 작가의 램프 B TONG을 집에 소장하고 싶다고 느껴지진 않습니다.
어떤 미적 탐욕을 느끼게 해 주지는 않지만 그 거리에서 캐치한 그의 순발력있는 감각에는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여행자의 이심전심.
그것을 미적으로 승화한 그의 감각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는 베트남인이 항상 쓰는 성냥갑 모양을 오마주 하여 램프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어떤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성냥갑 디자인에는 근대적 감각이 배어 있기 때문일까요. 어느 나라나 성냥갑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베트남인의 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이 익숙한 문양과 타이포 그래피를 장착하여 너비 56cm짜리의 램프를 만들었다니, 그 상상력에 박수를 더해줍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보지는 못하여 성냥 곽을 열 때 램프가 켜지도록 고안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만들었다면, 정말 신기하겠어요. 성냥 곽을 밀어 열면 마치 성냥이 발화하듯 램프의 불이 들어올 테니까요.
이심전심 로로 자자르,
하노이 벽면 콜라주는 제가 해볼까 했는데 이미 선수를 친 작가이지만 질투보다는 애정어린 하이파이브를 건네어 보겠습니다.
베트남에서 만나는
너낌적인 너낌의 한국
이거 너무 익숙하잖아.
익숙한 듯 아니 다른 듯.
베트남 속의 한국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타이포그래피입니다.
민트 바탕의 성조 품은 알파벳 표기가 한국 배민의 저력을 싣고 베트남 온 동네를 달립니다.
배달의민족이 베트남 시장에 진출하며 개발한 서체 '배민 다니엘체(BM Daniel)'가 국제 서체 대회 'Type Champions Award 2020'에서 수상했습니다. 이 서체는 베트남어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으며, IBM, MoMA, Adidas등과 함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니 꽤 훌륭하죠. 배민은 서체를 활용한 마케팅을 통해 현지인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고, 베트남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독특한 문구를 담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베트남 시장을 겨냥한 추가 서체 개발도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 뿌듯합니다.
‘배민’: ‘배달의 민족’은 ‘베트남 민족’까지 닿는 큰 그림을 처음부터 그리고 있었나 봅니다.
외벽 커다란 광고판에 쓰여 있는 문구
'BAEMIN Nóng Giòn Đây!' (배민 농 쫀 더이!)는
'배민은 뜨겁고 바삭바삭해요!'
직관적으로 식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표현!
크~ 좋습니다~
베트남 전통의 미를
글자 속에 쌓아 올리다.
젊은이가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
그게 또 얼마나 멋진가요.
제게 깊은 감명을 준 베트남의 그래픽 디자이너
전통 스타일에서 모던 타이포그래피를 접목한 도 총 닷(Đỗ Trọng Đạt)이라는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 디자이너의 작품에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글자를 보는 순간 그냥 그것은 베트남의 전통의 미를 대표하는 사원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타이포그래피를 일컬어 'frozen sound' 또는 'written voice'라고 합니다. 'letter'라 하지 않는 까닭. 노래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를 담은 듯 살아 움직이는 듯 그렇게 생명을 가진 것이 타이포그래피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젊은 작가인데 베트남의 전통을 글자에 녹여내었습니다. 그의 타이포그래피는 베트남의 불교 사원, 각 가정의 제단 모양의 장식적 모티브를 메인 아이덴티티로 삼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선형에 전통적인 선과 간결함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창조한 서체를 보고 있는데 베트남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덴 서체의 자모가 렌더링 되면 베트남의 거리 풍경은 전통을 재해석한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로 변신할것만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q,”“m”및 “t”와 같은 자음에서는 베트남 전통 건축미를 유려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곡절 곡선을 담은 “â”및 “ô 와 같은 모음 및 성조 표기 문자에서 베트남 사원의 우아한 지붕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죠. 자모를 겹쳐 3D 형식으로 렌더링 하면 가정 제단의 모습처럼 완성됩니다. 라틴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베트남어이기에 서구적 언어의 그릇 속에 아시아 전통적 특성을 더해 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충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의 아름다움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여 창조된 결과물이 'Just Vietnam'이라니,
이 정도 디자인력이면 국가 브랜드 아이덴티티 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국가 상징 서체로 선택되어 공항에서부터 이 작가의 서체가 주룩 도배하고 있다면 국가 이미지에 아주 큰 미학적 플러스를 해 줄 것 같은데, 어떤 센스 넘치는 정부 관계자에게 이 작가가 들켰으면 좋겠네요.
타이포그래피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책 한 권 분량이 욕심나지만,
오늘은 여기서 워~워~ 하겠습니다.
https://www.behance.net/gallery/89615965/DEN-Typeface
https://www.behance.net/datdotr
https://vietnamesetypography.com/type-recommend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