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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인규 Dec 27. 2024

깜빡이의 추억

인과관계를 바꾸는 사고에 대해

아주 어렸던 시절에 나는 버스 타기를 좋아했다. 특히 버스 운전기사 바로 옆에 서서 운전하는 모습과 기계장치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70년대 중반에 어린 시절을 보내던 아이들에게 버스 운전기사가 조작하는 레버와 계기판은 쉽게 구경하기 어려운 최첨단 기계 문물이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버스의 차체가 운전기사의 손발 동작에 따라 가고, 서고, 회전을 하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은 운전기사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마술 같은 깜빡이 램프였다. 오른쪽 깜빡이가 켜지면 운전기사는 좀 있다가 오른쪽으로 회전을 했다. 왼쪽 깜빡이가 켜지면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회전을 했다. 나중에서야 운전기사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해서 레버를 움직이면 깜빡이가 켜지고 버스 외부의 방향지시등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서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깜빡이가 마치 요즘 시대의 내비게이션 같은 역할을 한다고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말전도’는 인과관계를 바꿔서 생각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나타내는 사자성어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바꿔서 생각하는 것은 때로는 혁신의 단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현상이나 문제를 분석할 때,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접근 방식은 새로운 관점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숨겨진 상관관계를 발견하거나, 문제해결 방식을 다양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경영자라면 매출 감소가 문제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재평가하여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 연애 중인 연인들은 상대방의 차가운 태도가 내 행동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성찰을 해봐야 한다. 학교 선생님들은 좋은 성적이 학습 동기를 유발하는지, 학습 동기가 좋은 성적을 만드는지 분석해서 학생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기존의 문제 해결 방법을 뛰어넘어 더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결과 때문에 원인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은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지만 때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서 생각하다 보면 실제로는 상관관계만 있을 뿐,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정책 결정자가 여름철에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높아지면 익사사고가 많아진다고 판단하고, 아이스크림 판매를 금지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것이다.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면 책임소재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 집안 환경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지저분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생활은 영영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어제저녁 지하철에서 내려 붐비는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보게 된 버스 운전석의 깜빡이가 나의 어린 시절과 인과관계의 혼동이라는 사고에 대해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극이 많으면 생각할 것도 많아진다. 아니, 생각을 많이 할수록 자극을 받을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인가?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세상에 절대적이고 명확한 인과관계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현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많은 현상들이 어느 정도는 원인이고, 동시에 어느 정도는 결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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