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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Dec 04. 2023

전 직장 동료의 연락을 받았다.

전 직장 상사의 래퍼체크가 온 그곳

이전 회사에서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 이직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에 잘 적응해서 다니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를 힘들게 했던 전 직장 사수의 래퍼첵 전화를 받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intothebluesea/88


많은 분들이 속 시원한 빌런의 후일담에 대해 전해 달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뭐 워낙 퍼포먼스는 잘 뽑아(사람 갈아내어) 내시는 분이시니 잘지내리라. 믿는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쨌든 나는 새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고 그 역시 오히려 자기가 떠나버렸다고 하니 더 이상 신경 쓸 일도 없는 것이다. 퇴사 후에도 친구처럼 잘 지내는 전전회사 동료들과 달리 전회사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 당시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고 마지막에는 진짜 나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실수를 남발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도 항상 도움받고 부끄러움이 있어서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전히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막중한 업무인 사장님의 복심 덕구의 삼시 세 끼를 챙겨주고 있는데 또 카톡이 왔다. 가끔 업무를 같이 하던 전 직장 동료였다.


[잘 지내시죠? 인스타 보니까 행복해 보이던데 ㅋㅋ]


[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ㅋㅋ 지금도 중요 업무 수행 중입니다.]


[그분 소식 들으셨죠? 진짜 어이없어서 ㅋㅋ]


[어떤 소식이요? 아시잖아요 저 그쪽으로 고개도 안 돌려요]

(굳이 내가 래퍼첵을 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 진짜요? ㅋㅋㅋ 그분 OO으로 이직했어요.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자기가 이직할 줄은]


한 동안 이런저런 안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나는 T발 놈은 아니지만 전 직장 사수님의 지도 편달 아래 오래 있다 보니 이런 얘기가 길어지면 '그래서 용건이 뭔데?' 이게 미친 듯이 빨리 알고 싶어 진다. 그래, 오래간만에 술 한잔 하자는 것도 아니고 래퍼첵 누가 했냐 알아오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오래간만에 연락한 용건이 뭐지 궁금해졌다.


[나가시기 전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제가 매니저님이 업무 펑크 낸 거 대신하느라 야근할 때요]


[아..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저한테 진짜 매니저님도 본인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랬잖아요]


[아.. 네 맞습니다. 그때는 진짜 저도 왜 그랬는지.. 실수만 산더미처럼 많고]


[지금 제가 그렇거든요... 그래서 매니저님이 생각났어요...]


일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


아니 일을 못하는데 왜 내 생각이 나냐! 지금 나 놀리는 거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사실 나도 겪어봐서 알고 있다. 저런 상태로 만들어 두는 것이 저 회사 특유의 업무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저 회사 내부에서도 자정작용을 통해 사라져 가고 있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인 물들이 라떼를 외치며 열정과 프로의식을 빙자해서 사람을 아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일잘러라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저런 시도조차 못하도록 업무 능력으로 눌러버리면 된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업무 성과가 노력하는 만큼 나오는 분야가 있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많은 의사결정 체계 아래에서 기획안_V.412_최종_수정_의견반영_최종의 단계를 거치는 직장인들에게 상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한 PPT 뺑뺑이를 돌리는 게 가능하다.

 



기획안은 치열하게 챌린지 하는 문화


회사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이 회사가 유명한 방식은 '챌린지' 문화였다. 기획안을 작성해 간 담당자가 상사의 컨펌을 받으면서 치열하게 논쟁하는 문화였다. 기획안의 그 어떤 방안으로도 챌린지가 들어와도 답변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어떤 수치에 대한 공격을 받아도 답변이 가능하도록 기획 단계에서부터 치열하게 논쟁하는 문화였다. 이런 방법으로 완벽한 자료를 만들고 또 어떤 공격으로부터 내성을 길러 기획안이 설득력을 가지고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하고 또 이과정을 통해 직원이 성장하는 매우 좋아 보이는 방식이었다.



답정너인데 챌린지가 될까?


하지만 이게 일부 꼰대들에게 악용되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용이 되었다. 일단은 기획안을 가져오면 치열하게 챌린지를 하고 논쟁을 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문제는 '답정너'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이었다. 치열한 논쟁은 상사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말 내 자료에서 단 하나의 틈이라도 발견되면 이제 엄청난 챌린지에 시달려야 한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회사에서도 이루어지는 챌린지다. 하지만 이 회사의 문제는 답정너를 인정하고 '그래요 네가 원하는 대로 수정할게요'도 안 되는 것이었다. 다른 회사는 치열한 챌린지를 통해 '답정너'의 '답'을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수정을 하면 됐다. 그리고 이 의사결정 단계마다 '답정너'들의 답이 서로 다른 것이 힘든 점이었다. 그래서 의사결정 과정이 계속 수정과 업그레이드를 하는 지난한 반복이었다.


내가 답정너가 된 것은 니 잘못이다.


이 회사는 그 과정에 약간 다른 게 있었는데 '답정너'가 답정너 짓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도록 내가 '치열한 논쟁 끝에 그의 논리에 설득되어 자료를 수정한다'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챌린지를 하다가 '네 그럼 당신 의견대로 자료를 수정할게요.'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매우 불손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저 과정이 '나 혼자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라는 생각과 '일을 못해서.. 그래.. 자료로 아예 챌린지가 못 나오게 눌러야지'라는 소위 '일잘러'들의 조언에 정말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지만 동료의 고민 역시 정확하게 나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사실 모두 다 일잘러가 된다면 좋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팀 내에는 에이스가 있고 내가 에이스가 아니라면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일보다는 순위가 덜 나오는 일들을 받게 된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나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면 된다. 상사의 챌린지는 성실하게 받아서 의견을 수렴 수정하며 수많은 버전의 수정본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그걸 가만 놔두질 않는 것이다. '육성', '책임감', '프로의식'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가스라이팅으로 조져놓는 것이다.


컨설턴트에게 지지 않게 일해


왜 이런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짐작을 해보면 이 회사는 컨설팅을 많이 받기로 유명했고 컨설팅으로 주요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컨설턴트들도 많이 입사를 했고 현업의 사람들은 컨설턴트에 지지 말자라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저항 의식에서 마치 컨설턴트처럼 챌린지를 하는 의사결정단계가 만들어졌고 그게 왜곡 변질되어 이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다시 동료와 대화로 돌아가서 나 역시 겪은 일이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동료는 크게 안심을 했다. 그 동료도 나름 다른 회사에서는 일을 잘한다고 얘기를 들었고 또 에이스가 아닌 기간에는 나름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며 성실하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이 챌린지에서 직장인으로서 기본 소양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결국 일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내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지게 되자 그는 조직 내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은밀하게 따돌려졌다.


스트레스가 많은 조직은 화형대를 만든다.


이런 문제는 이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떤 조직들은 조직 내의 스트레스를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으로 풀어낸다. 지금 동료가 당하는 역할은 내가 당하던 역할이었고 나에 이어 그 자리를 물려받은 나에게 몰래 상담하던 다른 동료가 좀 더 강하게 굴어서(?) 그냥 지루해져서? 벗어난 자리였다. 그 조직은 화형대를 하나, 또 때에 따라 두 개를 만들어 두고 거기에 누군가를 올려둔다. 주로 상사가 챌린지를 하는 그 사람이 올라가게 된다. '저 사람이 마녀다!'라는 상사의 낙인이 찍히면 동료들도 모두 가세해서 그를 암묵적으로 괴롭힌다. 재밌는 건 화형대에는 돌아가면서 올라가게 된다. 내가 일 잘하고 처신 잘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동료에게는 저런 얘기보다는 이 사태가 당신의 능력 부족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 회사의 문화가 그렇다 정도로 말을 해주었고 나 역시 걸어온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참으면 (화형대의 주인공이 바뀐다면) 인정을 (다른 마녀가 너 대신 올라가고) 받게 될 것이라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기 때문에 꼭 신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진다면 거기를 박차고 나오는 것도 결코 인생에 있어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회사에서 다들 프로페셔널한 가면, 굳세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가면 뒤에는 다들 저마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갔지만 그 무대가 조직 내의 부조리를 풀어내려는 화형대였다면 나의 능력은 그저 불태우기 좋은 불쏘시개일 뿐이다. 


화형대에 올라간 것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전략은 두 가지다.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이다. 물론 싸워서 내 역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불타오르며 고통과 싸우면 다음 차례의 희생양이 교대하러 온다는 것이다. 개인이 세워진 화형대를 바꿀 수 있을까? 매트릭스의 네오 정도 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럼 오늘도 화형대에서 불타며 내 커리어를 위해 또는 가정을 위해 버틸까 도망갈까를 고민 중인 모든 직장인들에게 바친다. "거기 올라간 거 당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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