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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Jan 20. 2021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듯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소고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선택 불가능한 상태에서 나는 누군가와 누군가의 사이에 이름 모를 누군가로 태어났다. 그 누군가들은 나의 부모가 되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나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그들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의지를 가지고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존재들은 어떠한 운명으로 짝지어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넣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도 기쁨도 미움도 서운함도 행복도 배워가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가끔 생각한다.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의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태어날 선택을 했을까와 같은 생각 말이다. 마음에 들고 말고를 따져보기도 전에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평생을 불려 가야만 하듯 가족도 내겐 그런 존재와 같다.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은 개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가족은 버릴 수도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다. 나의 선택에 의해 한 테두리 안에 속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덮어놓고 원망할 수도 없고, 반대로 체념하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또 뭔가 억울하다.


내게 가족은 이런 존재다. 좋아하는 가수의 어떤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내가 나를 인지하고 알기도 전에 나를 태어나게 해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이름을 나에게 붙여줌으로써 그 이름의 굴레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과 같이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그런 존재.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한창 사춘기일 때 버릇처럼 툭툭 튀어나오던 말이 있었다. “엄마가 뭔데?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 바로 ‘남’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었다. 엄마 뿐만 아니라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이모에게도 사촌들에게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부 다 ‘남의 일에 신경 끄시지!’와 같은 태도와 말투로 일관했던 것이었다. 당시 나에게 ‘남’이란 그저 내가 아닌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남’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여러 가지 함의에 대해 생각할 만한 성숙한 깊이도 없었고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니었기에 내가 말하는 ‘남’은 그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아실 리 없었고, “부모가 왜 남이야! 가족이 어떻게 남이야?”라는 말과 함께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지지 않으려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당시에 나에게는 세상에 나만이 가장 중요했고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뚤어진 마음에 내가 선택할 수 없었음에도 나의 가족이 된 이 사람들과 가난한 상황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렇게 ‘남’을 외쳐댔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아닌 타인은 모두 남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부모님께서는 핏줄과 혈연으로 얽혀 있으면 남이라고 할 수 없다는 완강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기에 딸의 반항기 어린 ‘남’ 타령을 가만히 보고 계시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개념에서 비롯된 오해는 쌓여갔고, 기력을 소모하는 다툼의 날들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친구가 전부일 것 같던 어린 시절도 지나고 나만 알던 시절도 흘려보냈으며 이젠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꽤 되었다. 나의 일은 온전히 내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고,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도 쉽게 억울하다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 그렇게도 남 같이 느껴졌던 가족의 의미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들처럼 완전하게 '남'인 존재도 아닌, 나와 남의 중간 어딘가에 자리한 가족이라는 존재. 사회에서 아무리 배신 당하고 억울한 일에 치여도, 설사 내가 잘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위로해주고 나의 말을 들어줄 그런 존재, 가족. 내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나의 가족이 된 것처럼 그들 또한 나를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들의 가족이 되었다. 이로써 우린 지나온 세월 동안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서로를 보듬고 안아주는 존재로서 서로에게 자리잡았고, 이러한 가족의 의미를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어리석고 어린 마음에 가족의 의미를 돈과 사회적 지위, 명예 등과 결부시켜 생각하고 멋대로 가치 평가를 내렸었다. “나도 부자인 부모 만났으면 유학도 가고 원하는 만큼 공부하면서 내 꿈 이룰 수 있었어!”라고 목소리 높이며 유독 우리 가족에게서 부족한 점만을 콕 집어내어 나의 불행과 불운을 설명하는 데 썼다.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가족의 의미가 꼭 내게 물질적으로 무엇을 해주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더라. 물론 여유 있는 삶이 너그러운 태도를 만든다거나 더 많은 기회를 보장해주는 것은 맞고 이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가난 속에서 꽃피운 우리만의, 남들에게는 없는 소소하지만 따뜻한 추억과 기억이 있기에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작고 높은 언덕들을 오르내리는 힘겨움을 온실 속 화초보다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야생화로 자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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