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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01화
딸이 물었다. 매일 거절당하는 그 일을 왜 하는 거냐고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을 너에게 보낼게
by
리하LeeHa
Oct 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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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너에게
네가 일곱 살 때던가.
조그만 손으로 편지를 써서 준 적이 있었어.
당시 너는 편지 쓰기가 취미였지.
또 수많은 편지지를 망치는 것도 취미였어.
편지지 한 장에 주먹만 한 글자 몇 개를 써놓고는
낄낄대던 너를 보며
속으로 '글자 좀 작게 쓰면 좋을 텐데...' 했단다.
나는 편지지를 아까워하던 엄마였어.
그러던 어느 날 네가 준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지.
'
엄마도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라는.
그 글을 보며 약간 충격을 받기도 했던 것 같아.
'엄마는 집에서 너랑 노는 게 좋은데..
네가 말 안 들으면 싫기도 하지만
아이 키우는 엄마의 삶이란 것이 다 이렇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살던 내가,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
네가 써 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어.
그 편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엄마는 구부러진 몸을 가까스로 펴보았어.
마흔을 목전에 둔 엄마도 스스로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으니까.
미련한 불안감을 곰인형 품에 안듯
끌어안고 살 때였거든.
무섭고 두려웠지만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하게 됐어.
그 후 이런저런 공부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며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었지.
그런데 생각만큼 동화가 술술 써지지도 않았고
꿈꾸던 만큼 책이 빨리빨리 출간되지도 않았어.
동화 작가로 등단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마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열심히 쓰지 않았을 때도 있었는데
뭔가를 계속 생각하며 써보려는 시도는 항상 했어.
기대만큼 안돼서 그렇지,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니야.
한동안은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투고를 해도
매번 거절당하기만 하던 때도 있었어.
문학상을 받고 등단을 했다고는 해도
내 이름을 건 문학 작품을 출간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어.
하도 거절을 당하니까
엄마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때 조금 더 커서 사춘기가 된 너는 이렇게 말했지.
"뭐 하려고 자꾸만 보내요?
매일 거절당하는 그 일을 왜 해요?
그냥 기분 나쁘니까 보내지 마. 엄마.
작가 같은 거 안 해도 엄마는 괜찮은 사람이야."
너는, 사랑하는 엄마가
수많은 출판사에 거절당하고
공모전에 낙방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을 거야.
그 마음 나도 알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야.
그런데 나는 줄기차게 거절당하고
끊임없이 외면당하면서도
그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
여전히 거절과 외면의 순간을 맞닥뜨리며 살고 있지.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했지만
이젠 그런 마음은 많이 사라졌어.
좋은 글을 써서
제대로 된 동화책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크니까.
그래서 엄마는 오늘도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
사실 내가 '거절당하는 삶'을 선택해서
이렇게 사는 이유 중의 하나는
너 때문이기도 해.
꽤 커다란 부분을 네가 차지하고 있지.
세상엔 우리 뜻대로, 나의 뜻대로만
되는 일은 없거든.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단다.
그 사실을 네가 꼭 기억해줬으면 해.
그럴 때마다 지레 포기해 버리고
뒤로 나가떨어져 버릴 수는 없는 거잖아.
누가 나를 거절하면....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든지.
거절을 견뎌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키워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며
실력이나 마음을 보살펴서
여물어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엄마는 한때 거절당하는 게 너무 두려웠어.
무시당하는 것도 괴로웠고
실패하는 것도 힘들었지.
출판사로부터 되돌아오는 거절 메일의 무게는
하염없이 무겁단다.
우울하고 슬프지.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
그 과정을 지금도 감당하는 중이야.
너, 기억나니?
예전에 오목 둘 때마다
흰돌만 가지겠다고 네가 고집 피웠던 거.
검은 돌은 밉다고 손에 쥐지도 않았지.
검은 돌은 늘 엄마 차지였단다.
엄마가 좋아하는 장영희 교수님께서 제자에게
흰돌과 검은 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해.
인생에는 정해진 만큼의
불운을 나타내는 검은 돌과
행운을 나타내는 흰 돌이 있다고
말이야.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란
곧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라는 거지.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돌이 있다니까
검은 돌을 빨리빨리 뽑고 나면
흰 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시간들도 있지 않을까?
엄마는 이제 인생의 검은 돌들을 만나면
무서워하거나 주눅 들기보다는
얼른 쓱싹쓱싹 해결하고
그 다음번 돌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려고
해.
다음번 돌들이 빛나는 '흰색 돌'이려면
그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검은 돌'들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래서 엄마는 늘 거절당할 준비.
외면당할 준비를 하며 살아.
부지런히 살다 보면
엄마 인생에서 거절당하는 순간들이
더 빠르게 다가왔다가
더 날쌔게 지나가버리겠지.
엄마는 오늘도 검은 돌을 뽑고 있어.
언젠가 나올 흰 돌을 기쁘게 맞이하는 법을
겸허하게 배우고 있는 중이야.
이게 바로
거절당하는 그 일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상처 받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네 인생의 힘들고 슬픈 검은 돌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나아가기 바란다.
누구에게나
정해진 개수만큼의 흰 돌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네가 현명했으면 좋겠고,
고통과 슬픔 역시
너의 현명함을 채워나가는
데에
재료가 된다는
사실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검은 돌을 뽑아도 괜찮아.
우리는 그 녀석들을
이제 거의 다 뽑아가는 중일 거야.
keyword
딸
인생
편지
Brunch Book
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01
딸이 물었다. 매일 거절당하는 그 일을 왜 하는 거냐고
02
김밥 꽁다리가 먹기 싫다는 너에게
03
엄마, 가장자리 끝으로 와요.
04
타인의 불행을 내 행복의 근간으로 삼지 말 것
05
쓰러지는 쪽으로 쓰러지면 일어선다
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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