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에서 조그만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수변 공원이 펼쳐진다. 코로나 극복 차원에서 공원 한 편에 튤립 꽃밭을 조성한다고 할 때는 무심코 지나쳤다. 다른 꽃들도 시기를 달리하며 피었기에 튤립이라고 해서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다 차를 타고 오며 가며 차창 밖의 흐드러지게 핀 튤립을 보게 되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고왔다. 에버랜드 튤립축제에 시간 내어 가지 않아도 아쉬운 대로 집 앞 튤립 꽃밭에서 꽃구경을 열심히 하며 다가 온 봄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는 꽃이 있어도 여전히 고운 튤립.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뭐가 그리 바쁜지 집 앞 튤립 구경도 제때 못한채 차일피일 시간만 흘려 보냈다. 그러다가 튤립이 서서히 시들어갈 때쯤에야 직접 보러 나가게 됐다. 한창 어여쁠 때가 지나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나마 이 모습이라도 어디냐 싶어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기도 했다.
4월 까지는 예뻤던 튤립들...
그렇게 예뻤던 튤립들이 5월 중순경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튤립 보러 나갔다가 얼마나 황망하던지. 두 눈을 비볐다. 튤립이 다 사라진 자리는 예전의 그 꽃밭이 아니었다.
"꽃이 다 지면 꽃밭은 꽃밭이 아니라, 그냥 밭이 되는구나...."
5월 중순 튤립이 다 사라져 버린 튤립 꽃밭
내년의 튤립 꽃밭을 위해 긴 기다림에 들어간 구근들
튤립 구근이 심어져 있는 밭에는 <튤립 식재지 보호>라는 안내 표지가 있었다. 내년 3월에 또다시 예쁜 꽃이 필 것이라며 밟지 말아 달라는 안내 문구도 함께였다.
3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단 두 달, 화려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튤립꽃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일 년 중 단 두 달, 아름답게 피기 위해 흙 속에 자신의 일부인 덩이뿌리를 묻어 놓고 10개월을 기다리는 튤립.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보살피는 엄마의 심정을 튤립은 꼭 알아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인에게 사랑 받는 예쁜 꽃을 피워낼 순간을 떠올리면 튤립 구근에게 10개월의 기다림쯤은 그리 길지 않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이를 기다릴 때 조급해 하기보다 사랑으로 축복하며 감사해 했던 것처럼. 또 버거운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원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의 뒤안길에는 분명 이런 '흙밭'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흙밭'이 진정한 가치라는 걸 우리는 다 안다. 화려한 튤립 꽃밭의 이면에 이처럼 붉고 거친 흙과 덩이뿌리가 혼재된 밭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내년 튤립 꽃밭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 흙속에 푹 파묻혀 있는 나도 작은 꽃이라도 피워보기 위해 내 나름의 준비를 살살 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