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랑비탈 Feb 13. 2023

1. 잃어버린 시간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중학교 2학년 교실, 선은 칠판을 보면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나 그것은 연기였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은 10분 단위로 계속 시계를 훔쳐보고 있었다.

선이 집중하는 것은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그렇게 공부하고도 성적이 상위권을 찍었다면, 그때 다른 친구들은 제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선은 거기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다른 친구들도 선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람?

이렇게 시간을 몽땅 날려버리다니!

힘이 빠졌다.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때, 선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척하면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고문과도 같았다.

아마 선이 좋아하는 어떤 ‘생각의 유희’에 빠졌다면, 금방 선생님으로부터 분필조각이 날아올 게 뻔했다.

그러나 선은 누구에게도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심지어 또래들에게도.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평범한 생각들뿐이었으니까.


선은 그 시간을 심플하게 포기했다.

굴종의 시간.

잠시, 어른들에게 우호적으로 삶을 대여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어쩔 수없이 운명에 저당 잡힌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선은 자기의 희생으로 무능한 군상들―선생님들이나 교육 관계자들―이 꿀을 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생각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 선의 유희였다.

대상을 바라보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느낌 속에 빠져드는 것…….

선의 초등학교 친구들은 자기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기의 이야기가 선의 입에서 줄줄이 새어 나올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었던 ‘찰나의 느낌과 생각’을 읽어주는 행위에 불과했다.

선은 그 찰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찍고,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런 것들은 눈앞에서 번쩍 드러났다, 곧 사라지곤 했다).

그 속에 희망이 보였다(그것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고, 진리 같았다).

마치 달려가는 열차를 쫓아가듯이 그걸 붙잡고 싶었다. 그걸 붙잡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았다(사유란 삶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가장 합리적인 노력이 아닌가).

그래서 느끼고 생각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마음껏 사고의 동굴을 파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누구도 그걸 공부라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선은 가방을 들고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했지만 수인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모범생(모범수)이었지만 무능한 제도―국가적인 관점에서 무능한 제도가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줄기차게 유지되는 것 일지도 모른다―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


                                      *     

선은 신문의 한 구석에, 까만 테두리로 장식된 검정고시 학원의 광고를 보면서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했을 때,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드디어 엄마와 아버지가 별거를 선택한 것이다.

선의 아버지가 동네 유지였던 까닭에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친구들은 선 앞에서 예의 있게 침묵을 지켰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학교를 그만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선의 부모는 우등생이었던 딸의 자존심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 남자선생님의 첫 교련 수업을 받고 학교를 빨리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햇살이 가득한 운동장에서 건조한 목소리로 바지의 재봉 선을 기준으로 손을 바지 아래로 정확하게 내려놓으란 말만 반복하며 한 시간 내내 여학생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직도 바지의 재봉선과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그의 콧소리가 환청처럼 윙윙거린다(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모멸감이 느껴지는 시간, 그러나 군사정권 시대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선은 묵묵히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를 나온 담임선생님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웃으면서 선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치아를 있는 대로 드러내며 지나치게 밝게 웃고 다녔는데, 말을 할 때마다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까닥까닥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 과장된 몸짓은 다분히 희극적으로 보였지만 그녀는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을 하려면 고등학교는 나와야 되지 않겠어?”     

‘사람 구실?’ 나쁜 말을 저렇게 쿨 하게 던지다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무슨 기계의 부속품이란 말인가?

생각이라는 걸 별로 안 하고 살았던 게 분명한 그녀가, 선에게 이 사회의 부속품도 되지 못할까 봐 경고를 날린 것이었다. 걱정하는 소리는 아니었다(그녀는 선이 자신은 물론 이 사회의 평균보다 못한 인간이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선이 담임에게 느낀 것은 인종차별 같은 감정이었다.

선은 (사고의 나이테가 없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청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득세하는 세상이라니!     

학교를 그만둔 선은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보기 시작했다.

한국 문학 단편집과 창작과 비평 영인본, 그리고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해 주는) 멍 때리는 시간들.

그동안 사고의 굶주림 때문에 자유를 흡입하는 시간들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대학에 다니는 언니가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섬머힐과 에밀, 그리고 존 듀이의 교육론과 심지어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 입문까지 다 읽었지만 선의 최종학력은 중졸이 되었다.     

이전 01화 교육은 한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