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잠이라도 푹 자게 해 주자!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선은 나무가 취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고민했다.
나무가 다섯 살 때, 선과 함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초등학교에서 고학년을 맡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똑똑한 거, 다 소용없어! 선생님들한테는 말 잘 듣는 아이가 최고야. 생각해 봐! 애가 똑똑한 거랑 선생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선생님들도 바쁘고 귀찮다고!”
어린 시절, 선생님의 부당함을 보고 자란 세대가 선생님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학교는 긴 시간 동안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통제와 규율 속에 갇힌 교육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허용하는 범위와 학교에서 허용하는 범위가 너무 달랐다.
누구를 위한 학교일까?
교직은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 안정된 생활과 연금을 보장해주는 직업일 뿐이었다(그들에게만 사명감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 왔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걸, 뭐! 이렇게 속 태우지 말고 그냥 학교에 보낼까? 편하게……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경험을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에 부딪쳤다.
아이의 눈은 이미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력하지만 착한 아이, 그러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아이는 엄마의 선택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엄마를 위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가 받는 고통의 양과 상관없이 천진난만하게(사람에게 어린 시절이란 그런 것이다).
선은 어린 생명이 가엾게 느껴졌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 앞에서, 게으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부모들은?
그건 각각의 경우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가진 기질에 따라, 양육자에 따라 학교가 좋은 선택지가 되는 아이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의 DNA를 물려받은 나무는 아니었다.
나무에게 계절마다 다른 바람의 촉감과 냄새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 촉감, 그 냄새가 안내하는 시간의 초대를 충분히 즐기라고.
그리고 그 기억을, 그 순간을 잊지 말라고.
그걸 머릿속에 있는 하얀 종이 위에 써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언젠가, 네 겨드랑이에서 하얀 날개가 돋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은 천국은 아니지만, 가끔 천국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그 순간을 잡으라고, 놓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너무 바빴다.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학원을 순례하면서 어른들도 소화하기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 학년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할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서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다.
학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들끼리 농담이 오간다.
우리가 저 나이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A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한다.
“난 싫어! 안 할 거야!”
“나도, 싫어!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
B도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씁쓸하게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또 어디론가―다른 학원으로―가고 있다.
마음이 아팠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면서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이.
그것은 학대였다. 부모만 바라보고 있는 작은 생명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선이 나무에게 홈스쿨링을 시킨 첫 번 째 이유였다.
잠이라도 푹 자게 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