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나무의 취학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화교 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친구가 아이들을 화교 학교에 보냈는데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중국어 하나를 더 배우니까 좋더라고.
솔깃했다(이제 중국어가 대세가 아닌가?).
우선 작은 규모의 학교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통제와 규율에서 좀 자유로울 것 같아 좋은 대안 교육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소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화교 학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오래전에 지어진 교사, 낙후된 시설은 오히려 386세대인 학부모들의 레트로 감성을 자극했다(우리는 그동안 너무 현대적인 것에 지쳐있지 않았는가?).
화교가 아닌 학부모들의 직업은 의사, 변호사, 한의사, 중소기업 사장 등, 그 지역에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들이었다.
입학식 날, 선은 사립학교가 없는 소도시에서 좀 더 특별한 교육을 시키고 싶어 안달하는 부모들이 모였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거만한 눈빛과 가식적인 웃음을 교환하면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온 나무가 선에게 말했다.
“엄마! 어른이 될 때까지 내 생각은 숨겨야 되겠어!”
“왜?”
“응, 지금은 말하지 않고 그때 보여주는 거야!”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즐거운 개학 날’이라는 주제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그림을 그렸는데 나무는 비 오는 날, 어린이들이 번개를 맞으며 즐겁게 웃고 뛰어노는 그림을 그렸다.
재미있고 기발한 발상이었다.
특히, 번개를 맞는 표현과 색깔이 압권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게 뭐냐고, 집에서 다시 그려오라고 말했다.
이때, 선은 나무에게 뭐라고 위로했더라? 재미있다고, 잘 그렸다고 칭찬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거라고, 얼굴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를 수 있다고,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1학년 때 선생님들은 한국의 공립학교 선생님들에 비해 자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2학년이 되자 학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치부, 저학년, 고학년을 맡았던 선생님들이 모두 바뀐 것이다.
몇몇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매일 급식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에 들어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학교 식당은 엄마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생님들의 얼굴이 바뀌자―1학년 때 있었던 선생님들은 모두 대도시로 갔다―새로 온 선생님들의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엄마들까지
식당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식당은 엄마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교장 사모도 매일 학교에 들어와서 사교클럽의 여왕처럼 행동하면서 은근한 눈빛으로 학부모들에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화교 학교에서는 교사들 뿐 아니라, 교장 선생님까지 한국 학생들을 상대로 중국어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그들은 한국 학생들을 돈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70년대 초의 선이 다녔던 한국의 초등학교의 풍경을 연상시켰다(선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까지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는데 사실, 과외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매달 건네는 과외비는 촌지나 다름없었다).
나무의 선생님은 시험 전 날, 자기에게 과외를 하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출제한 문제를 미리 풀어보게 했다.
시험을 본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야! 어제 우리가 라오슬(선생님)하고 풀어본 문제랑 똑같이 않냐?”
자연스럽게 엄마들이 모여드는 식당은 그래서 은밀한 거래가, 은밀한 밀담이 오고 가는 장소가 되었다.
라오슬(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화교들이 중간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은 점심시간 외에는 식당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유독 유치부를 맡은 왕 라오슬은 엄마들이 있는 자리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함께 수다를 떨고 있었다. (왕 라오슬은 유치부를 담당하면서 저학년에게 도덕과 예체능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선이 교문 앞에서 나무를 기다리는데―선은 식당에 가지 않았다―식당파의 주류인 건이 엄마가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언니! 새로 온 진 라오슬이 실력이 좀 없는 것 같은데, 우리 학교에다 왕 라오슬하고 바꿔 달라고 하자!”
선은 화가 났다.
왕 라오슬이 엄마들을 조종해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꼼수를 부리는 것은 유치부 교사에게는 과외 제의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무가 화교인 아이들을 제치고 1학년 내내 1등이었기 때문에 선의 동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건 엄마들의 교권 침해지, 월권이야. 실력이 없다는 말도 나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눈치도 없고 야무지지도 않아서 답답하다고 엄마들이 얼마나 불만이 많은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 어느 선생님도 그 정도의 문제는 다 가지고 있어. 진 라오슬 보다 왕 라오슬이 더 낫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나는 기본 적으로 엄마들이 이렇게 학교 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 됐다고 생각해! 생각해 봐! 한국 학교라면 감히 이렇게 하겠어?”
선은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건이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했던 말이 식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게임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건이 엄마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선이 찬성하면 본인이 왕 라오슬에게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이고, 선이 반대하면 선을 궁지에 빠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
저학년들에게 도덕과 예체능을 가르치는 왕 라오슬은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나무를 차별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발표를 하려고 손을 들어도 외면하기 일쑤였고, 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면 일방적으로 나무만 혼을 내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여럿이 상처가 났는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약을 발라 주면서 나무에게는 약을 발라주지 않았다.
나무는 바지를 걷어 다친 무릎을 선에게 보여주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 나도 이렇게 피가 났는데 왕 라오슬이 건이랑 선우만 소독해 주고 나는 안 해줬어. 그래서 내가 화장실 휴지에다 물 묻혀서 닦았어!”
“왜? 라오슬한테 해달라고 하지?”
“해 달라고 했는데 라오슬이 약통을 들고 그냥 교무실 쪽으로 가버렸어!”
음악 시험을 보는 날, 나무가 1등으로 가사를 외워 불렀는데도 제일 낮은 점수, 68점을 주었다(나무는 1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학예회의 노래 부르기 대회에서 3등을 했다. 그것은 같은 학년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나무 외에 낮은 점수를 받은 아이는 마지막으로 가사를 외운 아이였는데, 그 아이의 점수는 87점이었다). 그것은 나무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를 주어, 나무의 평균을 떨어뜨리고 1등인 나무의 석차를 끌어내리려는 수작이었다.
아이들은 영리했다.
왕 라오슬이 나무를 차별하는 것을 눈치챈 몇몇 아이들이 나무에게 함부로 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무엇을 하든 나무만 따라 하는 아이들이었다.
거기에 나무의 성적을 시기했던 엄마들도 한몫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아이가 나무를 놀리는데도 웃고 바라볼 뿐,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선은 엄마들의 비뚤어진 모성애에 절망감을 느꼈다.
선에게 학교는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들은 삶의 여유와 에너지를 모두 아이들의 경쟁에 쏟아붓고 있었다.
내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필승의 의지! 엄마들의 암시에 아이들은 도덕적 본능까지 쉽게 포기했다.
부모들도 아이의 부정한 행동이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도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축구를 하면서 부모로부터 비교당하는 친구의 다리를 슬쩍 걸어 넘어뜨리거나, 시험을 볼 때 책상 밑에 참고서를 숨겨놓고 커닝을 하기도 하고, 고학년 학생들 중에서는 선생님이 시험에 출제하는 문제집을 봐 두었다가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 (선생님의) 문제집을 훔치는 학생도 있었다.
모두 고학력의 부모를 가진 유복한 가정의 아이들이었지만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교육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정의도 염치도 없는 교육이었다.
경쟁에 지친 어린아이들은 성적이 좋은 친구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영악하게 행동했다.
선생님이 있는 곳과 없는 곳,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을 구분해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선은 ‘아이들이 이중성을 처음 배우는 곳이 학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