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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01.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

준비



브루마블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하여 중년의 한국 작가는 스페인 마드리드 레지던스에 입주하게 되었는가?



지난해 봄 나는 덜컥,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레지던스에 입주작가로 선정되었다.


내가 지원한 이 사업은 원주 ‘박경리 토지문화관’과 스페인의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Residencia de Estudiantes’가 교환학생 교환하듯 매년 한 명의 상대방 나라 작가를 3개월씩 서로의 레지던스에 묵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토지문화관은 대표적인 한국의 작가 레지던스이고,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는 번역하자면 그저 ‘학생 레지던스’지만 유럽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10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으로 무장한 곳이고, 세계 학계와 예술계에 혁혁한 업적을 이룬 분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아인슈타인과 퀴리부인, 살바도르 달리와 루이스 브뉴엘 등이 계신다. 아무튼 이런 어마어마한 곳에 2019년에 입주할 한국 작가로 선정되는 엄청난 행운이 덜컥, 내게 떨어졌다.


물론 2018년에도 떨어졌다. ‘주어졌다’가 아닌 ‘낙마했다’는 의미로. 나는 2018년에 이 곳에 지원했다 떨어졌고 이번 지원을 하면서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지원한다고 들었고 이전에 이 레지던스를 다녀오신 분들을 통해 매우 훌륭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기에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지원한 이유는 되든 안 되든 해본다는 태도에 있었다. 안되면 말지, 하지만 지원도 하지 말란 법은 없잖은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조차 돈키호테적일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지원서에 돈키호테에 대해 쓰겠다는 포부를 밝힌지라 선정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즉시 그 삐쩍 마른 몸집에 매부리코로 묘사되는 늙은 기사가 떠올랐다. 그래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두고 봅시다.


이처럼 운 좋게 올해 입주할 한국 작가로 선정이 되긴 했지만 그곳에 가기까지는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니 어마어마했다. 일단 출국일인 9월 1일 전까지 쓰던 시나리오 마감을 해치워야 하고(마감을 해야 잔금을 받고 그래야 스페인에서의 여비를 충당할 것이 아닌가!), 스페인어도 제대로 배워야 하고, 객지에 나가 있을 것이니 몸도 만들어야 하고(치과부터 가자), 무엇보다 돈키호테를 다시 읽어야 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 <돈키호테>는 패스하자. 일본판 애니메이션 <돈키호테>도 패스하자. 중학교 때 읽었던 다이제스트판 <돈키호테>도 아니다. 고교 시절 피카디리에서 봤던 박중훈 최재성 주연의 <내 사랑 동기호태>도 잊자. 대학 시절 휘뚜루마뚜루 읽어버린 <돈키호테>도 떠올리지 말자. 솔직히 그 시절엔 돈키호테를 읽는 것보다 돈키호테처럼 날뛰는 게 더 당연하던 시기라 얼렁뚱땅 읽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돈키호테> 못지않은 분량에 내용은 몇 배나 읽기 고된 <파우스트>를 완독하고 <파우스터>란 장편소설도 쓴 사람이 아닌가! (정통 스릴러 소설 <파우스터>는 2019년 봄에 출간돼 현재까지 절찬리에 판매 중에 있습니다. 중간 광고). 그래, 다시 한번 부딪혀 보자. 완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이 돈키호테를 읽어보자.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온라인 주문을 넣으려 인터넷서점 창을 열었다. 음, 비싸다. 그것도 두 권. 번역자도 다양하다. 판권이 자유로운 고전이니 이곳저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음, 비싸고 두껍고 많다. 어쩌지. 미루고 싶다. 아니다 진군이다. 기사여 내게 힘을 주소서. 마침내 나는 숙면 각도가 잘 나오는 880~950페이지로 세팅된 목침형 판형 돈키호테의 주문을 눌렀다.    


 

'목침형 판형'의 돈키호테 1,2권 (열린책들)


며칠 뒤 책이 왔다. 예상 이상의 존재감! 그것들은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도구뿐 아니라 누군가를 강하게 타격할 수도 있는 물체였다. 그렇다. 내 멘탈이 타격받았다! 나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벽돌 같은 책 두 권을 책상 옆으로 치워두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책을 안 읽겠다는 게 아니다. 시나리오 마감이 급하다.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많은 영화인들이 내게 있다(대표, 피디, 기획실 직원. 셋이나 있다). 그러자 위로가 됐다. 돈키호테보다 중요한 건 마감이지. 암. 그렇게 나는 읽기보다 쓰기에 몰입했다.


여름이 시작됐다. 시원스쿨 온라인 강좌로 틈틈이 스페인어를 익혔다. 홀라. 부에노스 디아스. 꼼 에스타. 미 놈브레 김호연. 므이 비엔. 간단한 인사들만으로도 힘들었다. 나이 들어 배우는 어학은 내가 늙었다는 것 즉 기억력이 감퇴했다는 것을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치과 진료는 스케일링 선에서 다행히 마쳤고 <파우스터> 출간으로 나름 활동이란 것을 하느라(책을 판다는 핑계로 사람들과 술을 마시러 다니느라) 불은 체중은 슬슬 조절해 나갔다. 그리고 마감은... 여름이란 계절이 마감될 즈음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맞아. 책상 옆에 석고보드처럼 놓여있던 그것을 뜯어내야 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뒀던 돈키호테 1,2권의 완독은 여름 한철 원주 토지문화관에 입주해 해결해야 했다.


토지문화관에 입주한 뒤 나는 매일 연세대 원주 캠퍼스로 걸어 가 돈키호테를 읽었다(연세대 원주 캠퍼스 역시 토지문화관과 교류 관계로, 도서관과 체육관 등을 입주 작가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곳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암튼 뙤약볕 아래 원주 외곽 국도변 3.5킬로 남짓을 걸어 연세대 도서관에 다다르면 내 자신이 늙은 기사가 된 듯했다. 도착하는 즉시 900여 페이지의 돈키호테 책이 담긴 갑옷 같은 가방을 벗어던지고 숨을 고른다. 산초도 둘시네아도 로시난테도 없는 나는 그렇게 돈키호테의, 돈키호테에 의한, 돈키호테를 위한 정신으로... 책을 읽었다. 2019년의 여름을 원주 시골의 청명한 하늘과 녹음 아래서, 아스팔트 평야를 가로지르며, 언덕에 올라 맛보는 바람 한 점 같은 에어컨 냉기가 나오는 도서관에서 한 달 반 동안 1, 2권 모두를 공들여 완독 했다. 곧 토지문화관에서의 생활도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어느덧 팔월 말... 9월의 첫날, 돈키호테가 로시난테에 오르듯 비행기에 올라 13시간을 비행할 것이다. 돈키호테의 나라에 도착할 것이다.


마감과 완독으로 정신없이 보낸 그 여름, 대야를 투구로 쓴 돈키호테처럼, 제대로 준비한 것 없이 오직 돈키호테에 대해 쓰겠다는 일념만으로 출발할 날이 카운트다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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