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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03.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

출발


비빔밥 기내식에 대한 집착은 모처럼의 비행을 완전 망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랜만의 단독 비행이었다. 4년 전 결혼 후 모든 비행 절차는 아내가 책임져 주었고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발권부터 짐 부치기, 해외 기간 중 휴대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도착 후 그쪽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법, 무엇보다 서울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법까지!


무능한 남편이었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생활력 제로인 나는 그렇게 여행력 만렙의 아내의 도움으로 해외 여러 곳을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독 비행이었다. 어찌어찌 공항까지 왔고 어찌어찌 짐까지 부쳤다. 휴대폰은 아내가 미리 세팅해 준 곳으로 찾아가 해외용 유심 칩을 접수했다. 공항 카페에서 아내가 적어 준 매뉴얼을 찾아 읽으며 유인원이 전화기를 다루듯 유심 칩 갈아 끼우는 법을 연습했다. 칩을 바닥에 두 번 떨어트렸지만 휴지로 깨끗이 닦았으니 별 문제없겠지. 아, 불안해.


그 와중에도 공항 서점에 들어가 버릇처럼 내 책을 찾아보았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파우스터> 두 권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서점을 나서는 나의 모습을 cctv로 보는 듯했다. 민망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마다 드는 cctv 시점의 나 자신을 겪기 체험이다. 인생이 그렇지. 뭐. 그래도 트루먼쇼처럼 모두에게 보이는 건 아니잖아. 어쨌거나 내게는 이런 민망한 행위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파우스터>를 비롯해 내 모든 소설은 기본적으로 ‘에어포트 노벨’을 표방한다. 공항에서 구입해 비행기에 오를 때 들고 타는 소설. 지루한 비행을 잊고자 펼치면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가 터닝된다는... 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그 장르의 소설 말이다. 그래서 내 소설이 공항 서점에 놓여있다는 것은 내 집필 의도에 부응할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찬스다. 에어포트 노벨을 쓰길 지향하는 소설가, 그게 나다. 한편 이 분야의 대가 스티븐 킹은 한술 더해 ‘자신의 소설을 더 읽고 싶어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아쉬워지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독한 영감탱이의 실력에 발끝도 못 미치는 나로서는 그나마 공항 서점에 책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오늘이다.   


비행기에 오르자 스튜어디스들은 놀면 뭐하냐는 식으로 식사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반드시 비빔밥을 먹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이 얼마만의 국적기인가! 토지문화재단 측은 내 항공권 비용과 여행자보험 비용도 부담해 주었고 국적기를 타는 것 정도는 가뿐히 허락해주었다. 이 정말 부담 갈 정도로 감사한 일이 아닌가! 아무튼 실로 오랜만에 유럽으로 가는 직항 국적기를 탄 흥분을 만끽하며 나는 메뉴 주문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소고기 스튜를 먹었다. 왜죠? 그때부터 돈키호테의 광기가 뇌에 스며든 것이 아닌가 한다. 젠장.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상상 속 비빔밥의 밥알이 혀 속에서 고추장에 젖은 참기름과 함께 유영 중이다. 혀 속인지 두개골 안 편도체 어디인지 계속 매콤한 광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드리드. 작가는 솔 광장 부근에 한국식당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절대 가지 않는다. 작가는 가난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해외에서 한식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편견은 나쁜 것이다.


참기름 때문인지 문맥도 미끄러졌다. 분명 한국말로 메뉴 설명을 들었는데 옆에 앉은 한국인 여성분과 스페인 아줌마가 모두 소고기 스튜를 고른 순간, 창가에 앉은 나는, 나는, 나도 모르게 저도 소고기로...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왜... 어느새 내 머리엔 출발 전까지 즐겨 보던 예능프로의 유행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거슨 아니지’.




이 알 수 없는 광기를 잠재우려 나름의 논리를 갖다 붙여 보기로 했다. 먼저 옆에 옆자리 세련된 한국인 여성분이 쿨하게 비빔밥을 패스해주는 것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옆자리 스페인 아줌마 이 분 역시 한국에서 숱하게 ‘두 유 라이크 비빔밥?’을 들었을 것이고, 드셨을 것이다(착석하자마자 한국 기념품을 살펴보시며 흐뭇해하시던 모습을 보면 이분은 분명 비빔밥을 좋아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 그녀 역시 노련한 마타도르의 몸짓으로 돌진해오는 붉은 투우와 같은 비빔밥과 코리아의 압박을 제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매료되었고 당연히 투우의 나라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소고기 스튜를 먹어야 하는 것이라 납득된 것이다. 무엇보다 레드와인에 어울리는 것은 한식 전도사들의 말과는 달리 비빔밥이 아닌 소고기 스튜라는 깨달음이 “소고기에 레드와인 주세요”를 발음하게 된 것이 아닐까? 결정적으로 여기에 비빔밥은 다음 끼니에서 먹어도 되지 않는가라는 안일함이 고명으로 추가되었다. 자, 대한항공 서울 - 마드리드 직항에 비빔밥은 첫 번째 끼니에만 제공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공지합니다(2019. 9. 1. 기준). 그리하여 나는 이후로 두 달 열흘 간 한식을 못 먹는다는 것도 모른 채 소고기 스튜를 먹으며 재미없기 그지없는 한국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제작 관계자와의 친분으로 고른 그 영화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역시 기내에서는 비빔밥과 프랑스 아트무비를 봐줘야 한다. 명심하라.


국적 항공기의 비빔밥만으로 이번 연재를 다 해치우려는 심보는 확실히 문제가 있지만 이번 연재에서 비행기에서의 가장 엄청난 순간을 묘사하기는 벅차기에, 분량 정리를 위해 나머지 비행기에서의 해프닝을 먼저 말하겠다.


신혼여행 이후 4년 만에 탄 유럽행 비행기의 운항시간은 정말이지 길었다. 젊은 시절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곤 했다. 아직 볼 영화가 3.5편이나 남았는데! 맛없는 기내식이라도 두 끼는 충분히 더 먹을 수 있은데! 이번엔 맥주를 마실지 와인을 마실지 행복한 고민을 한 번이라도 더 하고 싶은데!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랄 알타이 산맥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데! 하지만 내 나이 어엿한 사십 대 중(후)반. 이제 폐소 공포증으로 경련이라도 올까 봐 심호흡을 하며 어서 이 길고 지루한 비행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운항정보를 연신 클릭하며 앞으로 남은 비행시간이 지금까지의 비행시간보다 길다는 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반복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중년의 소설가에게 세상은 넓고 유럽은 멀었다.  


방법은 이코노미 탈출이다. “이게 다 돈 때문이라고요!” (얼마 전 폐막한 연극 <망원동 브라더스>에 나오는 주인공의 클라이맥스 대사이기도 하다. 중간 광고.) 비즈니스 좌석에만 앉아도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그러니까 나이에서 오는 피로감을 상쇄할 서비스와 환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배낭여행이 맞고 늙으면 패키지여행이 적절하듯, 돈을 더 들여 더 편하게 다니는 것이 육체의 저하 부분을 상쇄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아직은 이코노미를 타도 거뜬하다고 여기는, 아직 청춘이라고 까부는 중년의 지친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날의 창가 자리가 깨닫게 해 주었다.   


창가 자리가 알려준 진실은 또 하나 있었다. 우랄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 호수를 목격하며 가야 한다고 노래를 부른 바람에 아내가 발권해준 창가 자리는 이후 옆자리 두 여성분에게 잦은 ‘쏘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이유인즉슨 비빔밥 대신 소고기 스튜에 와인을 마시며 후진 한국영화를 본 나는 술기운으로 실수를 잊고자 맥주를 주문했고, 새우깡에 맥주를 마시며 상념에 잠기다가 다시 맥주를 마셨고, 그러다가 쓸데없이 오줌보를 키웠고, 옆자리 여성분들에게 수시로 이동을 하며 잦은 불편함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젊을 때는 오줌도 잘 참았는데... 내 불편한 진실을 깨닫느라 주변 분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점에 어느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미안했어요. K62, L62 탑승객 여러분.


결론적으로 이 모든 기내 해프닝이 비빔밥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밝히며 오늘의 연재를 마친다. 다음 회에는 비행기에서 돈키호테를 만나게 된다.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를 만나버리고 만 것이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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