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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05.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3

만남


의외로 돈키호테는 가까운 데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갈 때마다 대략 네 편쯤 영화를 본다. 첫 작품의 선택을 인맥으로 한 결과 실수를 빚었고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과다 복용한 맥주로 여러 물의를 끼쳤다고 앞서 말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영화 채널을 부지런히 뒤지기로 작정하고 찬찬히 앞사람 뒷좌석에 붙은 액정 속 메뉴를 연신 두드려댔다(실로 민폐 갑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겠다. 거기서 나는 돈키호테를 보았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A Man Who Killed Don Quixote)라는 제목이 떡하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뭐지? 뭐죠? 1등석에도 이런 맞춤형 서비스가 있을까요? 돈키호테를 쓰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예상치 못하게 돈키호테에 대한 영화를 발견하다니! 올라! 무이 비엔!! (더 격한 스페인어 감탄사 무언가!!!) 나는 숨죽인 채 영화를 클릭했다.


“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보드카 광고 촬영을 위해 스페인의 작은 마을로 오게 된 잘 나가는 천재 CF 감독 ‘토비’(아담 드라이버). 촬영에 고전을 겪던 어느 날, 우연히 스페인에서 촬영했던 자신의 졸업작품이자 출세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DVD를 보게 된다. 직접 촬영 장소를 헌팅하고,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배우로 섭외하는 등 모든 것에 열정이 넘치던 꿈 많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당시 영화 촬영 장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돈키호테’(!)가 되어 버린 구둣방 할아버지가 자신을 ‘산초’라고 부르며 무척 반갑게 맞이하는데… 17세기(!) 돈키호테와 21세기 산초(?)의 환상적이고 기묘한 여정이 시작된다!


네이버 영화란에 나오는 소개글을 긁어왔다. 오늘의 연재 분량을 날로 먹으려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의 작품 맥락을 알아야 독자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임을 굳이 밝힌다. 액정 속 소개 글은 시놉시스의 절반 정도였지만 나는 감독과 배우의 이름만 보고도 이미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려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라니 뭔가 대단히 어울리고 적절했으며 벌써부터 환상과 광기가 벌떼처럼 왱왱대는 듯했다. 게다가 아담 드라이버와 조너선 프라이스는... 뭔가 꽤나 새롭고 익숙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이후 검색을 통해 이 작품이 테리 길리엄의 25년에 걸친 인생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팬이자 영화인으로서 상당한 부끄러움을 느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듯, 돈키호테가 결투 적수를 향해 돌진하듯 곧바로 영화 감상을 시작했다. 황량한 갈색의 카스티야 황야가 등장하고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가 등장한다. 그 뒤를 노새를 탄 산초 판사가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풍차. 돈키호테의 시그니처 장면인 풍차 거인에게 돌진하는 늙은 기사의 무모한 액션이 나오면서 컷. 곧 이 오프닝 장면이 CF 촬영 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는 CF 감독인 토비 역의 아담 드라이버가 등장한다. 메타 픽션의 선구자 격인 돈키호테의 구조를 영화 역시 시작부터 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정신없이 영화에 몰입했고 보는 내내 행복했다. 지난 두 달간 읽었던 소설 속 돈키호테의 장면들이 근사하게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현대적인 해석으로 그 숨은 의미가 더 알차게 숙성되어 나올 때는 비행기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때마침 러시아 상공이었다. 이대로 하강해 영화 속 토비가 찍는 광고 속 보드카를 찾아 마시고 싶었다. (이하 스포일러) 돈키호테 속 중요한 요소인 무어인들과 그들의 문화는 이슬람인 마을로 등장하고, 돈키호테를 괴롭히는 마법사들은 CF를 의뢰한 자본가 물주로 나온다. '돈'이야말로 현대의 마법이고 그들은 ‘돈지랄’로 돈키호테와 산초를 무력화시킨다. 그 와중에도 돈키호테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기사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전진과 돌진을 거듭한다. 그는 미쳐 살았고 제정신으로 죽는다. 그리고 산초로 오인받던 토비는 그 자신이 돈키호테가 되고 새로운 산초를 발견한다. 실로 기똥찬 설정과 재현이었다.


그렇게 테리 길리엄의 완성된 꿈을 목격했다. 세르반테스의 인생 자체가 돈키호테적이었듯이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완성하는 과정 역시 돈키호테적이었다. 자연재해로 촬영이 무산되고 주연배우가 죽을병에 걸리고 투자자가 빠지고 캐스팅이 번복되고 하는 와중에 감독의 인생 후반기 25년도 흘러갔다. 엔딩 크레딧엔 존 허트와 장 로쉬포르, 두 명의 배우에게 헌정한다는 자막이 나오는데 모두 돈키호테를 연기하던 중 촬영이 무산되고 이후 돌아가신 분들이다. 그리고 이걸 2000피트 상공에서 미친 듯 빠져들어 감상한 나 역시 돈키호테에 대해 무언가 쓰려고 스페인에 가는 길이지 않는가! 메타 픽션의 메타 픽션화,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세르반테스의 계시를, 돈키호테의 광기를, 테리 길리엄의 저주를 받아 안아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추후 찾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를 만들기 위해 돈키호테처럼 되어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위한 광기와 노력은 삶에서 무척 중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삶에서 흥분되는 일, 경이로운 일을 잃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명징한 답이라 나는 솔로몬의 재판정에 온 기분이었다. 이렇게 빠르고 알찬 해답이라니... 남은 3개월의 여정은 이로써 명쾌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소심하고 기운도 전 같지 않은 키 작은 중년의 동양 작가가 돈키호테에 대해 쓰기 위해 스페인에 가서 돈키호테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돈키호테를 만들기 위해 돈키호테처럼 돼야 한다’는 테리 길리엄의 저주 혹은 명령은 이후로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시 비행기에서는 영화가 끝나자 급하게 찾아온 소변 욕구에 잠든 스페인 아주머니를 깨워야 했다. 돈키호테보다는 산초 판사에게 어울리는 본능일 따름이었다. 오줌을 누며 생각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돈키호테보다는 확실히 산초 판사가 어울리는 체형과 행동거지다. 그런 내가 돈키호테가 될 수 있을까? 쓸 수 있을까? 암, 영화 속에서 아담 드라이버도 산초로 오해받은 채 돈키호테를 뒤쫓다 결국 돈키호테가 되지 않았나? 그래, 일단 돈키호테를 뒤쫓자. 산초처럼. 그러다 보면 무어라도 쓰겠지. 그것은 삶에서 흥분되는 일이자 경이로운 일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줌보가 비워지자 머릿속도 맑아졌다. 나는 지퍼를 올리고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더 이상의 영화도 더 이상의 맥주도 필요 없었다. 기내 담요를 망토처럼 두르고 목 베개를 갑옷처럼 착용한 뒤 눈을 감았다. 곧 꿈을 꾸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내 꿈의 기록일지 모르겠다. 세르반테스의 기록이 그의 꿈이자 인생이었듯이.


테리 길리엄의 인터뷰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이 어떤 환상을 믿기로 했는가는 언제나 중요한 질문이다. 돈키호테는 항상 품위가 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언제나 품위 있는 미치광이가 되고 싶었다. 그걸 시험해 볼 수 있는 돈키호테의 땅이 내게 펼쳐져 있었다. 도착까지 7시간 남았다. 기내에서 꿈을 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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