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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07.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4

도착


한국의 중년 작가는 어찌하여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스페인 대학생들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는가?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드디어 스페인의 관문에 도착했다. 트럼프가 있는 미국과 이제는 안 가기로 한 일본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한마디로 간편하다. Hola! 출입국 직원과 한 마디 나눈 뒤 도장 쾅. 나는 곧바로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왔다.


일요일 오후 6시 반(스페인에서 6시 반은 ‘확실히 오후’다) 공항은 의외로 붐비는 편이어서 살짝 긴장이 됐다. 유일한 믿는 구석은 레지던스 측에서 온다던 픽업. 사실 이 픽업이란 걸 한국에서부터 은근 기대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낯선 나라의 공항에서 초면의 외국인이 내 이름을 영어로 적은 종이를 들고 날 기다린다는 것은... 일종의 버킷리스트였다. 해외 비즈니스 같은 것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내게는 이런 상황은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고, 무엇보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본 사람의 마중'이 주는 특별함이 날 설레게 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공항을 나서 분주한 터미널을 한참 두리번거렸음에도 나를 마중 나온 낯선 이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쪽도 나를 못 찾는 듯했다. 터미널은 국적기가 도착한지라 한국인이 많았고 한국인 마중객들이 많은 관계로 꽤나 붐볐다. 그러던 중 앳된 인상의 스페인 여자분 셋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손에 들린, A4용지에 볼펜으로 열심히 획을 몇 번 그어 적은 영문 이름 'KIM HO YEON'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반가움과 신기함을 함께 머금은 미소와 함께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비올레타, 라우라, 앙헬리카. 세 명의 대학생은 레지던스에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째 묵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택시에서 대략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들은 레지던스 관계자로부터 오늘 나를 픽업해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들 역시 레지던스의 지원을 받는 학생들이었기에, 데이트나 해야 할 일요일 오후에 멀리 동양에서 날아온 키 작은 아저씨를 택시 태워 오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듯하다. 이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도 좀처럼 마주칠 일 없는 대학생 세 명과 택시를 탄 채 영어로 대화를 하자니 어색하고 민망하고 뭔가 들뜨고 하는 게 내가 마드리드에 왔다는 것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좌로부터) 라우라. 앙헬리카. 비올레타.

                                                        


하지만 처음 본 스페인 대학생 셋과 택시의 앞뒤로 앉은 채 아직 시동이 걸리지 않은 영어로 수많은 궁금증을 나눈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마드리드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고전하던 중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당신은 스페인까지 무엇을 쓰러 왔습니까?" 나는 즉답했다. "돈키호테에 대해 쓰러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멸종을 앞둔 철새가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온 걸 본 듯 신기해했다. 내가 얼마나 진지한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오늘 비행기에서도 돈키호테를 목격했다며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갸우뚱이었다. 하긴 20대 대학생들이 노장 감독이 만든 예술영화를 쉽게 접했을 리가 없다. 그러던 찰나 다행히 비올레타 혹은 앙헬리카가 혹시 아담 드라이버가 나오는 영화가 아니냐고 응수해주었다. 그렇지. 역시 교양이 있는 학생들이로군. 그래서 나는 대화의 물꼬를 텄고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를 최대한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주었지만 영어 탓인지 배경지식의 부족 탓인지 그들을 더 헛갈리게 만들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하고 안쓰러웠는지 아담 드라이버를 아는 학생이 친구들에게 "그 스타워즈 리부트에서 나쁜 놈으로 나오는 코 긴 놈 있잖아."라고 말했고, 그러자 여대생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바로 그 놈이로군요, 라는 표정을 덧붙이며. 나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포기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노 에스빠뇰. 미안해요. 갑툭튀 돈키호테.


이후로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돈키호테를 쓰기 위해 왔다는 사실은 비밀 지령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사람들이 물으면 그저 스페인 날씨가 넘 좋아서요,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직관하는 게 소원이어서요, 마요르 광장 뒷골목의 버섯요리를 맛보고 싶어서요, 소피아 미술관의 게르니카를 목격하기 위해서요, 라는 식의 대답을 준비해두기로 했다. 돈키호테는 어쩌면 이곳에서 화석화된 용어일지도 모르겠다. 갓 인천공항에 들어온 스페인 작가에게 누군가 묻는다. 한국에 어떻게 오셨어요? 춘향이에 대해 쓰려고요. 산초 판사 같은 월매와 둘시네아 같은 이도령에 대해서도 쓰려고요. 뭐 이런 식이 아닐까? 그러면 다시 질문이 들어간다. 두유 노우 싸이? 두유 라이크 김치? 두유 노우 기생충? 아무튼 돈키호테를 만남 초기에 내세우는 것이 좋은 전략이 아닐 수 있다. 나는 내 미션을 좀 더 숙성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바라하스 공항에서 마드리드 레지던스까지 거리는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 정도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미터기는 고정되어 있었다. 30유로. 아마도 정찰제인 듯하다. 기사 옆 좌석에 앉은 나는 내내 그것을 주시하면서 안고 있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토지문화관 여지인 학예사님 말에 따르면 스페인 작가도 한국에 오면 인천공항에서 원주 토지문화관까지 픽업을 해준다고 했다. 그 말은 이곳에서의 픽업 역시 스페인 레지던스의 몫이라는 것이고 그 뜻은 내가 꼭 택시비를 지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인데... 문제라면 내 예상 속 픽업은 배 나온 레지던스 관계자 아저씨가 낡은 폭스바겐 SUV로 나를 태워가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택시 픽업이라니... 상황이 은근 애매했다. 뒷좌석에 옹기종기 앉은 저 90년 후반 생 스페인 대학생들에게 택시비를 내게 한다는 게 과연 맞는 것인가, 아니면 저들은 이미 택시비를 받아서 온 것일까? 영수증을 챙겨 내면 돈을 환급 받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이곳에서 봉착한 첫 난관이었고 이곳에서도 이런 고민에 빠져야하는 내 가벼운 재정 상태와 심약한 내장 기관의 상태에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웅장한 레지던스 입구


조잡한 고민이 깊어지는 와중에 택시는 널찍한 거리를 지나고 지나 마침내 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철문과 철문 사이 벽돌 기둥에는 석고상 머리를 한 심볼과 함께 RESIDENCIA DE ESTUDIANTES라고 적혀있었다. 벌써 도착이라니! 결국 가난한 작가의 주요 기술 중 하나인 ‘구차하지만 지갑 늦게 꺼내기 신공’을 발휘하자 "노노노노노!"라는 채근과 함께 그녀들 중 하나가 기사에게 서둘러 돈을 건넸다. 레지던시에서 내는 거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비올레타, 라우라, 앙헬리아, 그들은 참으로 센스 있고 바람직한 이베리아 반도의 인재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빨리 택시 요금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면 내가 공항에서 마드리드로 진입하는 길의 차창 밖 풍경을 부담없이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란다.


그들은 숙소 체크인과 식당, 카페테리아의 위치, 사용법, 공용 냉장고와 탕비실, 런드리룸 사용법을 차례로 알려준 뒤 마지막으로 3층에 위치한 내 방으로 안내를 했다. 그들은 이 레지던시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이 있어 보였고 그런 소속감은 매우 좋아보였다. 비록 3개월이지만 나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생길 것인가? 소개받은 326호실에 들어서자 금방 가졌던 의문의 답이 바로 나왔다. 내부는 정말이지 ‘코지’했다. ‘코지’라는 영어단어를 설명하려고 지은 세트장 같았다. 2평 반 정도 실내의 입구로 들어서자 왼편에는 화장실 오른편에는 벽장이 있었다. 아름답고 커다란 아치형 나무창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는 어두웠고 갈색의 나무로 만든 맞춤 가구들이 책상과 수납장으로 한 세트, 침대와 협탁으로 한 세트 놓여있었다. 역시 나무에 천을 덧대 만든 책상 의자와 침대 옆에 자리한 널찍한 응접 의자는 당장이라도 앉아 몸을 기대고 싶어 보였다. 그저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몸을 운신하고 최소한의 소지품을 배치하기에 적당한,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공간이었다. 마치 중세 수도원 수도사의 거처 같기도 하고, 멕시코 감방 마약왕의 독실 같기도 했고, 애리조나 국도변의 조잡한 앤틱풍으로 꾸민 모텔 같기도 했다.


326호. 석달 간의 거처.

                                                                     

인생이 ‘작업실 찾아 삼만리’였다. 한국에서도 도심, 내륙, 산골, 제주도까지 오가며 작업실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다니다 결국 이렇게 스페인 마드리드에 작은 공간을 하나 얻게 된 것이다. 이 곳에서 석 달 간 돈키호테에 대해 그리고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쓸 것이다.


대문자와 소문자에 숫자까지 마구 섞은 열세자리가 넘는 WIFI 비번을 알려주는 것으로 나를 픽업해준 대학생들의 미션은 종료되었다. 그라씨아스와 아디오스를 번갈아 외치며 그녀들을 보내고 나자 이제 나의 미션이 시작되었다. 바로 돈키호테를 찾아... 아니 식료품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놀라운 것이 이곳은 9시에 저녁식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두 시간 뒤의 저녁보다는 간단한 빵과 치즈 그리고 물과 와인이 급할 따름이었다. 창문을 여니 오후 7시의 햇살 아래 오랫동안 가꿔온 듯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어둑했던 방안이 오후 햇살로 순식간에 밝고 따사로워졌다. 그때 이 땅의 마법은 바로 이 맹렬한 햇살임을 알게 되었다.


해는 매일 질 것이고 이국의 밤은 아직 익숙지 않을 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식량을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식탐에 쩔은 산초 판사의 자세로 태연하게 레지던스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섰다. 마드리드의 일요일 오후가 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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