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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09.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5

방황


그가 이국에서의 첫날 굶어 잠든 건

시차 적응 때문인가 다이어트 때문인가 아니면 어리석음 때문인가?



<돈키호테>를 다시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산초 판사였다. 나 자신이 이런 해학적인 캐릭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산초 판사가 지닌 숨은 매력을 자세히 살피니 실로 이런 매력남이 없을 지경이었다. 말하자면 볼매. 그래서일까 이야기 속에서도 산초는 돈키호테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다. 대표적으로 백작 부인은 산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꼽을 잡으며 그를 옆에 두려고 한다. 그리고 산초가 이런 익살꾼 캐릭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기사 돈키호테가 대책 없이 굴 때마다 뒤치다꺼리를 하고 무엇보다 언제나 식량과 예산, 잘 곳을 용케 챙겨 종복으로서의 노릇에 충실하다.


마드리드에서의 첫날 저녁 나는 식량을 찾아 낯선 거리를 한 시간 정도 헤맸다. 무작정 레지던스를 나온 뒤 산책 겸 동네 파악 겸 주변 거리를 마냥 걸었는데, 이곳의 위치가 시내가 아닌 외곽임에도 쭉쭉 뻗은 거리마다 행인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모퉁이마다 편의점이 있는 한국에서 온 사내는 '이곳도 걷다 보면 가게 하나 나오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산책을 나섰고 그 산책이 거의 '방황' 수준에 이르고 나서야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게 되었다. 없다. 일요일이어선가? 참말로 가게라고는 하나도 없다. 구멍가게도 없고 편의점도 없고 대형 마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리의 식당에 펼쳐진 노천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이른 저녁(8시가 넘었는데 이른 저녁!)을 먹는 모습들만 눈에 들어왔다. 구수한 음식 냄새도 코를 자극했다. 미치겠다!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몸뚱이에 허기가 더해지니 이대로 탈진하진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리가 많이 풀렸고 비슷한 곳을 몇 번이나 돌다 보니 방향 감각도 무뎌져 이러다 숙소도 못 찾고 노숙을 하는 건 아닌가 두려워졌다. 당신은 첫날부터 풍찬노숙하던 돈키호테를 따라 해 보겠다는 것인가? 그렇게까지 돈키호테에 빙의되려는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러자 산초 판사가 떠올랐다. 돈키호테의 고난의 행진에 우직하게 동참해 너스레도 떨어주고 말대꾸도 하고 식량과 잘 곳도 꼬박꼬박 준비해 주는 그런 누군가가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표류 중인 배고픈 이방인일 따름이고 주위엔 아무도 없다. 순간 머리에 퍼뜩 깨달음이 일었다. 내가 돈키호테일 리가 없지. 역시 나는 산초 판사에 어울리지. 누구의 보살핌도 아닌 나 스스로 식량과 거처를 구해야 하지. 투덜대는 돈키호테에게 핀잔을 주고 딱딱한 빵을 건네주는 넉살 좋은 산초가 내 포지션인 것이다. 그동안은 스페인 마드리드 레지던스에 입주 작가로 초대된 것에 고무되어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착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돈키호테가 아니다. 산초다. 저잣거리의 지혜로 나아가는 길라잡이여야 한다.


돈키호테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지만 결코 굴하지 않는 산초 판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둠이 완전히 내리고 나서야 숙소를 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첫날 만에 숙소 주변 밤길 지리까지 파악한 점은 칭찬할 만 하다만 식량 확보는 결국 실패. 허기진 배와 지친 발걸음으로 326호로 돌아와 뻗고야 말았다. 머릿속에서는 저녁 9시에 레지던스 식당이 열린다는 게 떠올랐다. 초청 작가인 나는 이곳에서의 숙식이 무료다. 얼마든지 가서 편히 저녁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움직이기가 싫었고 그것은 본능적인 행태에 다름 아니었다. 지난 12시간의 비행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크리고 왔다. 오자마자 스페인 대학생 세 명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알려주는 레지던스 사용 정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혼자 일하며 지냈다. 하루에 적어도 일고여덟 시간은 늘 진공상태처럼 나와 시간만이 작업실을 채워야 했다. 내게 컨디션을 지키는 법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은 숨 쉴 공기처럼 내게 필수적인 것이었고, 지금 식당에 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를 하는 것 이상으로 급박한 요구였다. 말하자면 허기를 이긴 독기(獨氣)랄까.


나는 공복의 배를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시차 적응으로 인해 잠은 오지 않았고 확인해보니 7시간 빠른 서울은 새벽 4시. 잠들었을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그렇다. 잠도 오지 않고 막막한 밤, 결국 나는 컴퓨터를 켜고 돈키호테를 열었다. 앞서 들으신 대로 돈키호테는 엄청난 무게의 두 권짜리 책이다. 책이자 짐이다. 며칠 전 짐을 싸며 트렁크에 벽돌만 한 돈키호테 1,2권을 집어넣는 나를 아내가 만류했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려고?”

“당연하지. 돈키호테에 대해 써야 하잖아. 이건 바이블이자 지도 같은 거라고.”

“그래. 근데 꼭 종이책으로 가져가야 하나?”

“응?”

“파일로 가져가. 작품 파일을 구매하면 되잖아.”

“그게 가능해? e북을 말하는 거야?”

아내는 한숨을 쉰 뒤 벽돌 두 개를 트렁크에서 제거했다. 그리고 돈키호테를 파일로 구매해 내 노트북에 넣어주었다. 초 아날로그 맨을 지향하는 나지만 벽돌 두 개 공간에 불닭볶음면 세 개와 소주 두 팩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점이었다. 그것은 기사도 시대가 끝났음에도 기사도를 실천하려던 시대착오적 인간 돈키호테와 동기화된 나만의 사정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마드리드의 첫날 밤부터 노트북을 켜고 간단히 돈키호테를 열어볼 수 있었다.


곧 이런 대목을 찾았다.


『그러고 나서 산초가 가지고 왔다는 음식을 꺼내 두 사람은 다정하게 먹었다. 하지만 그날 밤 묵을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빨리 그들의 보잘것없고 메마른 식사를 마쳐야 했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밤이 되기 전에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해가 짧았던 터라 그들의 희망은 산양을 치는 목동들의 오두막 근처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자지 못하게 된 것 때문에 산초가 괴로웠던 만큼이나 주인은 노천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기사도 수련을 용이하게 해주는 고행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노천의 숙박 대신 안락한 거처가 있고 보잘것없고 메마른 식사 대신 청승맞은 공복이 있다.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었다. 이곳은 라만차 지역이 자리한 카스티야니까. 카스티야의 마드리드니까.


시차 적응과 허기로 점철된, 잠 못 드는 레지던스의 첫날밤


다음날 아침. 7시는 여전히 어둑했다. 8시가 되어서야 해가 뜬 것 같다. 여름의 끝 기준으로 한국보다 정확히 두 시간 늦게 일과가 흐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5시의 여명이 이곳의 7시 여명으로, 한국과 달리 점심식사는 2시부터이고, 해가 지는 시간도 9시 정도였으며 저녁식사도 9시부터였다. 야행성 인간들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일출 일몰인 것이다. 반면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아침형 인간인 나는 새벽잠 없는 노인네가 된 꼴로, 거기에 허기로 속이 아픈 지경인 상태로, 좀비처럼 방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일어나자마자 아내에게 보낸 문자의 답이 왔다. 어제의 식량 구매 실패와 고통스런 공복의 밤에 대한 술회를 담은 문자에 대한 그녀의 답은 숙소 부근 식료품 체인 DIA의 위치를 찍은 구글 지도였다. 살펴보니 숙소에서 걸어서 10분이었고, 그렇게 거리를 헤매면서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내 행동에 대한 이해는 이후 아내와의 문자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휴대폰으로 구글 지도 보고 찾아가지 그랬어.

- 일단 산책이 하고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숙소를 나왔지. 부근에 가게 하나 없겠나 했고.

- 그럼 다니다 없음 휴대폰을 켜고 DIA를 검색했어야지.

- 숙소로 돌아가 와이파이 켠 다음 찾고 그러기 번거로워서...

- 왜 숙소로 돌아가. 그냥 켜고 찾으면 되지.

- 와이파이 안 되는 데서도 된다고? 이 유심이?

- 선불 유심입니다. 차감하며 쓰일 거고요, 문자가 2500통 무료. 데이터 30기가 무료거든요.

- 헉.


인천공항에서 아내가 미리 예약해준 유심을 받아 꽂아두었을 뿐, 그 유심이 어떤 기능이 있는지조차 체크를 안 한 것이다. 그저 해외에서는 데이터 폭탄이라도 맞을까 두려워 와이파이 되는데서만 써야지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쩔어 있던 나의 뇌가 터져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길을 헤매면서 30기가 데이터 중 0.0001기가만 썼어도 식료품점을 쉽게 발견했을 수 있었는데! 순간 골방에 처박힌 채 기사소설만 읽던 돈키호테가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골방에 처박혀 글만 쓰다 나 역시 이렇게 시대에 도태되는 것인가? 참말이지 험난한 첨단 세상을 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것도 이 머나먼 타국에서 이리 무식하게 굴면... 어떡하란 말인가? 어쩌면 내게 막대한 도움과 영감을 주는 아내야말로 산초 판사이자 둘시네아 인지도 모르겠다 느꼈다.


자책감에 머리를 쥐어짜느라 허기도 잊은 채 흐른 시간이 바야흐로 7시 반. 레지던스의 아침식사 시간이다. 마드리드에서의 첫 아침이고, 이곳에서의 첫 식사다. 아내의 존재와 그녀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9월 2일 월요일 아침. 마드리드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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