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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Jun 27. 2024

미련 없이 버리기

무소유는 자신 없지만

시작은 이렇다. 딸이 종강하고 기숙사 짐을 한가득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불만 빨아서 보낼 심사로 가볍게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의류사업을 하다 재고를 가득 남긴 업체처럼 옷들이 넘쳐난다. 갑자기 집을 늘릴 수 없으니 옷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고 지고 살아야 할 형국이다. 20대 여대생의 옷사랑. 충분히 이해하고 남는다. 특히 내 딸이라면 더더욱. 나 닮은 것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버리자. 딸! 안 입는 옷은 몽땅 버리자"

엄두가 나지 않는 표정이다. 가구와 가전을 제외한 원룸 이사물량이니 그도 그럴만하다. 딸은  버릴 것들을 하나둘 꺼내어 커다란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그럼 난 이참에 아들방 정리를 해야겠다. 딸과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먼지를 날리며 정리에 들어간다. 아들방 옷장개봉! 하~ 심란하다. '이걸 왜 여기다 박아놓은 걸까?'

'아. 이게 여기 있었네.' 엄마의 정신건강에 안 좋으니 자기 옷장을 열지 말라 했던 아들말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내 건강을 생각하는 효자다. 말이나 못 하면. 아니 말이라도 잘해서 이쁘다. 딸에 비해 옷가지들은 단출하다. 흰 티와 검은 티 그리고 검은 바지. 고등학교 남학생의 전형이다. 마구 엉켜서 뒤섞여 있는 것도 뭐 유난 떨 것 없이 당연하다. 버릴 것들을 다 끄집어내고 입을 옷들을 반듯하게 개어서 넣으니 무채색으로 어두웠던 옷장의 채도가 높아진 느낌이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안방 옷장을 열어버렸다. 이쯤 되면 사건이 복잡해진다. 하는 김에 내 것도 해야겠다. 양이 많아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스치듯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게시판에 붙어있던 헌 옷 수거해 주는 언니가 떠올랐다. 정리하다 말고 방바닥에 앉아 검색을 시작한다. 헌 옷을 수거하는 총각도 있고 언니도 있다. 이왕이면 총각으로 하자. 언니야 미안. 20킬로가 넘으면 가지러 온다기에 사방에 옷가지, 가방 등을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예약부터 잡는다. 오케이! 예약완료!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안방을 정리하자. 킬로당 몇백 원 쳐서 돈도 준단다. 버리고 돈도 받고 꽤 괜찮은 거래다. 안방 장롱 아래칸에 쓰지 않는 이불이 박혀있다. 앗! 솜이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보기만 해도 덥다. 결혼할 때 얼어 죽을 걸 걱정한 것일까. 얼어 죽기는커녕 겨울에도 반바지에 반팔 입고 사는데 저 무거운 솜이불은 왜 혼수 필수품목에 들어간 걸까? 안 하면 결혼 못하는 거였나 싶게 모두가 했다. 그땐 그랬다. 색은 여전히 곱다. 반짝거리며 윤기도 흐른다. 결혼 후부터 줄곧 침대를 썼으니 단 한 번도 펴고 누워보지 않았던 이불이다.

그래. 버리자. 공간만 차지하고 20년을 저 자세로 이사 다닐 때마다 따라온 저 이불 발 저릴 것 같다. 한 번은 펴보자. 저리지 않게 펴서 좋은 곳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솜이불은 수거불가 품목이란다. 결국 폐기물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솜이불아! 그동안 장롱 속에서 빛도 못 보고 고생했다. 잘 가. 한 번도 쓰지 않은 내 신혼 이불아.'

그렇게 곱디곱게 반짝이는 비단 솜이불을 폐기물 봉투에 넣고 옷장을 바라보니 내적갈등이 시작된다. 버릴 것과 남길 것 사이에서 늘 고민하다 다시 집어넣고 입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버릴까 하다가 추억팔이하느라 다시 걸고 살 빠지면 입는다고 다시 넣기를 여러 번 했다. 추억 담긴 옷은 유행지나  촌스럽기 그지없고 살 빼고 입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미련 없이 버리자. '그래! 결심했어.' 옷장에 옷은 많은데 입을 것이 없다는 말은 저것들 이제 안 입는다는 뜻이다. 그럼 버리자. 살은 안 빠진다. 절대. (나는 그렇다는 얘기다)

치료받느라 이쁜 옷을 입을 기회가 없었고 나잇살에 호르몬약까지 적극적으로 거들어 퉁퉁해진 나에게 2년 넘게 방치된 옷들이 맞을 리도 없다. 살 빠지면 입는다는 건 애초부터 전제가 오류다.  만약 혹시나 살이 빠지면 선물하듯 더 예쁜 새 옷을 사 입으면 된다. 이것저것 과감하게 끄집어내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이렇게 작은 옷을 입었다고? 배가 붙는 원피스라니. 날씬했네.' 나이 먹고 약도 먹으니 몸은 S에서 점점 L로 가고 있는데, 어쩌면 XL를 넘보는지도. 어째 소갈딱지는 XS로 가고 있는 것인가. 몸만큼 맘도 넉넉하게 넓어져보자며 한번 웃어본다. 이제 약핑계는 그만 대야 하는데... 아무튼 옷장에 공간이 생기니 빛이 들어오는 듯 숨통이 트인다. 아깝다는 생각은 옷과 함께 버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입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안 입을 게 뻔하다. 갑자기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더 버릴 것이 없나 구석구석 찾아보고 여기저기 닫힌 문들을 열어본다. 곧 또 채우겠지. 그리고 또 버리겠지. 그렇게 무소유도 풀소유도 아닌 어딘가에서 살겠지. 딸의 기숙사 짐정리로 촉발된 옷정리가 집안을 뒤집게 만들었지만 후련하다. 버리고 받은 돈으로 치킨이라도 한 마리 뜯어야겠다.



이러니 살이 빠질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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