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 가장 많이 알아야 할 사람, 나의 처음을 마주했을 사람, 그 이름은 아버지. 그러나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함께하는 시간, 같이 경험한 일상, 아무렇지 않은 대화들, 그 어떤 것도 서로가 많이 나누지 못한 채 그저 부모의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는 맛동산 과자를 자주 사 왔고 고기보다 생선을 드셨다. 가난하지 않았지만 아끼는 사람이었다. 전깃불을 잘 껐는지 확인했으며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어린 손자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열의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퇴직하고 옥상에서 양봉을 했으며 황도 통조림을 좋아했다.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아버지와 너무나 똑같은 사람이 내 앞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원래가 다 비슷한 건지 이후에도 난 아버지가 떠오를 만큼의 노인들을 자주 마주쳤다. 원망만 가득했던 아버지에게 언제부턴가 다른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 연민인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과 권위로만 군림하던 아버지는 애정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 주변에는 그저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들만 있지 않았을까? 젊은 시절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꿈을 꾸는 청년이었을까? 엄마를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을까?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였을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악플보다 더 안 좋은 게 무플이라던데, 그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건 한세상 산 사람에게 존재의 무의미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안됐을 수밖에. 그래서 그런지 모르는 사람이 아닌 기억되고 싶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부단히도 난 아이들을 이끌고 다녔나 보다. 맛집을 데려가고 좋은 곳을 보여주고 대차게 싸우기도 하며 이렇게나 주절주절 글도 쓰나 보다.
자꾸 그림을 그리자고 해.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데.
이것은 내가 처음 색칠한 것이다.
예쁘지?
그림책 『쑥갓 꽃을 그렸어』는 셋째 딸의 성화에 못 이겨 그림 그리는 한 사람, 역시나 우리 아버지와 모습이 닮은 아버지가 나온다. 왜 딸은 아버지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 그리라고 했다고 해보지 않은 것이라 했는데도 그리는 아버지는 또 어떤 사람인 건가 하고 그 둘의 친밀함이 궁금하고 부럽기도 했다. 현재의 시간에 아버지와 내가 있다면 우리 아버지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 요즘 세상에 누가 그래요? 그러지 말고 그냥 나랑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어린 시절보다는 꽤 넉살이 좋아진 아줌마가 나도 되었으니 어쩌면 그렇게 여느 딸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에게 타박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까탈스럽던 막내딸이 이제야 조금은 마음이 푸근해졌는데 그런 딸과의 일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 그러니 그가 불쌍한 것이다.
닮고 싶지 않았는데 삶이라는 게 참 얄궂게도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영향에서 비켜 갈 수 없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아끼는 사람들이 되었고 도덕적 잣대에 민감했으며 자기 자식들을 기어이 이기려는 부모라는 권위적 속내를 어지간히도 힘들게 감추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 그림이 왠지 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상해. 그림이 재미있어.
유춘하 할아버지는 보름간 그림을 재미있게 그리셨다. 구십 연세에 이렇게나 잘 그리시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예술가인 딸의 유전자는 아무래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나 보다. 지난주에는 도서관에서 70대 어르신들에게 가족에 관련된 그림책을 읽어드렸다. 아버지에 관한 그림책 한 권도 있었는데 한 어르신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다른 건 없고 그저 무서운 분이셨다고만 말씀하셨다. 수업 끝에 간단한 독후 활동을 했는데 그 어르신은 끝내 눈물을 훔치셨다. 짧은 글을 쓰셨다. 아버지 무서웠어요. 그래도 보고 싶어요. 나이가 더 들면 나도 어르신처럼 아버지가 보고 싶어질까.
아버지가 나를 모르고 나도 아버지를 모르니 우리는 서로 비겼다. 그리고 똑같이 안된 사람들이다. 다음 세상에선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친구 같은 부모를 만나고 싶다. 독수리 5형제의 막내딸이 아닌, 아버지가 아닌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그저 오롯이 나 혼자만이 양손에 엄마 아빠 손 꽉 잡고 룰루랄라 공중으로 뜀박질하며 노래 부르는 아이로 태어나고 싶다. 아버지도 그 세상에선 다정히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셨으면 좋겠다.
도서관에서 뵌 어르신처럼 나도 짧은 편지를 써본다. 지금은 이렇게밖에 못 쓰겠다. 당신의 세계가 궁금한 한 사람이 아직 여기 있어요. 보고 있나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