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좀 늦잠을 자고 싶다. 평일 아침 엄마로서의 할 일은 매일의 연속이니까. 주말만큼은 남편 찬스에 기대 게으름을 피운다.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오늘 아침은 이 남자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젯밤에 하지 않은 설거지거리가 가득인데. 주말에도 바쁜 아이들에게 아침은 먹여야 하는데.
더 이상 누워있지를 못한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우선은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린다. 어제의 빨래를 걷고 갠다. 밀린 설거지를 한다. 냄비를 올리고 가스레인지를 켠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아침 먹으라고 아이들을 깨운다. 나오지 않는다. 또 부른다. 몇 번을 부른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간다. 남편은 직장 동료의 결혼식을 간다 한다. 갈아입은 셔츠가 어째 구김이 많다. 어서 벗으라 하고 다림질을 한다. 따스한 열이 남아있는 셔츠를 받고 남편은 고맙다 한다. 그도 외출한다. 이제 드디어 혼자다.
가고 싶은 카페가 있다. 생각이 나면 후일을 도모하기보다 바로 행동에 옮기고 싶은 충동 때문에 동네 친구에게 번개를 친다. 상대는 시간이 어렵단다. 오늘 번개는 실패다.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진짜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이제 책을 좀 볼까.
예상보다 아들이 일찍 귀가한다. 냉장고를 수시로 열며 이것저것 찾아 먹는다. 아예 든든히 먹고 다시 나가봐야겠다고 하는 아이 말에 먹을거리를 더 챙겨준다. 아이는 간식을 먹으며 최근 이슈에 대해 얘기한다. 잘은 모르지만 너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맞장구를 쳐준다. 나름 괜찮은 엄마가 잠시 돼본다. 아이가 다시 나간다. 또 혼자다. 이젠 글을 쓸 차례다.
틈만 나면
작은 틈만 나면
바빠진 아이들, 체중 감량에 성공하며 운동에 더욱 매진하는 남편으로 인해 올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의도치 않게 혼밥의 저녁이 잦아졌다. 요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의 가정을 이루고 ‘식구’라는 단어에 나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던 터라 요즘의 일상 변화에 적잖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다른 시대가 오고 있다. 시간의 틈, 공간의 틈이 생기는 삶의 변곡점 시대.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부부만의 시간이 점차 많아질 것이고 다 큰 아이들이 복작거려 집이 너무 좁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이다.
“밥 먹을 때 옆에 있어 줄까?”
혼자 두고 운동 가기가 멋쩍었는지 자기만의 식단 조절 중인 남편이 말한다. 아니 괜찮아, 쿨하게 거절한다.
작지만 힘이 있는 나는
여리지만 살아있는 우리는,
여긴 너무 쓸쓸해. 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사실은 혼자 있고 싶었으면서. 저들이 보이는 경멸과 혐오감 때문에 함께 있는 게 싫었으면서. 저들이 나가서 기쁘면서. 성모님,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한 거죠?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 메리의 독백이다. 위태로움에 빠진 메리는 가족과의 사이에서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다가도 혼자 있기를 갈망한다. 쓸쓸하다는 글에서 난 잠시 멈칫했다. 단순히 혼밥 문제가 아니며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저 너머의 감정을 남편은 가늠이나 할까.
틈만 나면 멀리 나가 볼 거야. 높이 올라 볼 거야. 한 번은, 넘어 볼 거야.
글과 그림, 그리고 타이포그래피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벽한 그림책 <틈만 나면>. 이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용맹한 담쟁이는 기억의 저편도 소환한다. 학생들의 왁스질로 내내 반질했던 나무 복도, 오를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던 계단, 오래된 빨간 벽돌담, 여름이면 빨강은 초록으로 탈바꿈해 물결치듯 넘실대던 모교의 담쟁이 그것들이 오버랩된다.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꼭 한 번은 넘어 보겠다는 그 옛날 야심 찬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갑자기 툭 하고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틈. 어쩌면 지금이 다시 넘어 볼 타이밍이 아닐까.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삶의 전환이라는 틈. 낯선 그 틈에서 난 달리기라는 낯선 것에 도전하며 그 서막을 연다.
사랑스럽고 애잔하고
보고 싶던 영화 한 편을 본다. 2권의 책을 읽는다. 작가가 책에서 언급한 음악을 찾아 듣는다. 까무룩 졸기도 한다. 밀린 업무를 처리한다. 덕분에 시작하는 월요일이 덜 바쁠 것이다. 남편이 들어온다. 나의 틈은 잠시 스톱이다. 저녁밥을 안친다. 밥 냄새가 집 안 가득 구수하게 퍼진다. 마침 아이가 집에 온다. 같이 1박2일을 보며 깔깔대며 저녁을 먹는다. 설거지는 바로 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내일로 미룰 일은 많으니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