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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 꽃 Nov 23. 2024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에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버린 고향집 터 앞에 우두커니 섰다. 이은상 작사 홍난파가 곡을 만든 가곡 ‘옛 동산에 올라’의 노랫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던 일곱 살 아이의 추억이 서린 옛 집터에 와서 내 속에서 잠자던 기억의 문을 열었다. 

  겨울이 되면 꿩이 퍼덕이며 밭으로 날아와 먹이를 찾던 뒷밭은 밭고랑마다 비닐을 이불처럼 덮고 푸른 잎을 날개처럼 내민 마늘밭으로 변해있다. 큰 초가집 앞뒤로 감나무 수십 그루가 줄을 이어 서 있고 마당 끝에는 참솔 나무가 가지를 뻗고 식구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키를 키우고 있었다. 아침이면 그 가지에서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잠이 깨어 책보자기를 허리에 동여매고 학교로 향했다. 집을 휘감고 흐르던 실개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학교를 가려면 실개천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건너서 거친 풀밭사이를 지나서 갔다. 집 옆에는 옹달샘이 수정 같은 깨끗한 물을 담고 있었다. 옹달샘에 표주박을 띄워 놓으면 여름에 나무꾼들이 지게를 받쳐놓고 샘에 가서 마른 목을 축이고 흐르는 땀을 식혀 쉬어 가곤 했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동네. 저녁밥을 짓는 굴뚝에는 하얀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가을걷이로 들에서 바쁘게 일하던 사람들은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저녁 시간이다. 마당 앞 벌거벗은 감나무에는 전등불이 달린 것처럼 빨갛게 익은 감들이 올망졸망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늦가을의 어느 날, 등잔불 아래에서 어머니는 부산하게 전을 부치고 있었다. 다음날이 할머니 환갑이라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 환갑잔치준비를 하고 있었다. 찹쌀떡과 삶은 돼지고기, 잡채 등등 평소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마당 한가운데 펼쳐진 큰상에 올려지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소녀는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상에서 할머니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날마다 할머니 환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찹쌀떡이 제일 맛있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 마을 사람들은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곱게 한복을 입은 할머니를 가운데 놓고 환호성을 지르며 번쩍 들어 올려 헹가래를 쳤다. 다음은 아버지를 들어 올려 헹가래를 치고 잔치는 끝났다.


  그다음 날은 보리밭갈이가 있는 날이다. 전날의 잔치 분위기가 끝나지 않은 부엌에서 점심준비를 하던 고모는 일곱 살 조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밭에서 보리 씨앗 뿌리는 일꾼 아저씨들 담배 피우게 갖다 주라고 부엌 아궁이 위에 놓인 성냥 통을 건네주면서 가는 도중에 놀지 말고 빨리 갔다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이는 이 성냥이 과연 불이 켜질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성냥이 습기를 머금어 불이 켜지지 않으면 심부름 갔다가 다른 성냥을 가지러 집으로 다시 가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성냥개비를 꺼내서 부욱 그어 불을 켜려고 해도 불꽃이 일지 않았다. 여러 번 반복해도 마찬가지여서 짜증이 났다. 아이는 성냥통을 가지고 고모한테 돌아갔다.

 

 “고모, 이 성냥 불이 켜지지 않아요.”

 “그냥 갖다 주기만 하면 아저씨들이 알아서 쓰니까 아저씨들 기다리는데 빨리 가거라.”

  아이는 성냥불이 제대로 켜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다시 성냥개비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드디어 불꽃이 확 일면서 성냥개비에 불이 붙었다. 아이는 초가지붕과 맞댄 짚 이엉으로 두른 볏짚 노적가리에 불을 붙였다. 붙은 불을 보고 있다가 조그만 손으로 잡아서 비벼 끄고는 성냥을 가지고 보리갈이 하는 밭으러 갔다. 아저씨들이 밭둑에 앉아 고개를 길게 빼고 성냥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길 옆 밭둑에 하얗게 핀 들국화를 한 움큼 따서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 있게 집에 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붕 옆에서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양동이를 들고 볏짚노적가리 옆을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아이는 멀뚱히 바라보며 ‘왜 불났지? 이엉에 불붙었을 때 내가 분명 손으로 껐는데 무슨 일이지?’하며 혼란스러웠다.


  심부름 갈 때 노적가리에 붙은 불을 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 꺼지지 않은 불은 건조한 가을볕에 바짝 마른 짚으로 두른 이엉에 붙어 맞닿은 지붕으로 번져 올라가는 중이었다. 집 옆 밭에서 일하던 옆집 아저씨가 집으로 뛰어왔다. 집 마당 앞에 돼지 주려고 받아놓은 구정물통을 들고나가서 지붕에 부으면서, 집에 불났는데 빨리 나와서 불 끌 생각은 안 하고 뭐 하냐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워낙 장난이 심한 분이라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한 농담인 줄 알고 고모는 웃고만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부엌에서 다시 물동이를 가지고 나가기에 웬일인가 싶어 나가 봤더니 불이 지붕으로 붙어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옆집 아저씨의 발 빠른 행동으로 볏짚 노적가리는 다 탔지만 다행히 초가지붕으로 옮겨 붙기 직전에 불길은 잡혔다.


  집 가까이 와서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화가 잔뜩 난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 아이를 때리려고 했다. 옆집 아저씨가 아이를 얼른 등 뒤로 숨기면서 아이 놀라게 무슨 짓이냐며 가로막았다.

  불이 났을 때, 아이의 여동생인 네 살짜리 꼬마가 볏짚 노적가리 옆에서 옆집 또래 아이와 같이 놀고 있었고 불이 타오르자 꼬마는 부엌에서 점심밥을 짓고 있던 고모에게 가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고모, 언니가 불 질렀어.”하고 말했다. 고모는 어린애가 그냥 하는 말로 흘려들었다. 반응이 없자 다시 아버지한테 가서 언니가 불 질렀다고 해도 아이의 말이라서 역시 흘려들었다. 꼬마는 타오르는 불이 좋았는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채질을 하고 같이 놀던 또래 아이는 손에 불 쬐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속담이 아닌 실제로 불난데 부채질을 하는 꼬마가 귀여웠는지 일이 수습되고 나자 동네사람들에게는 ‘불난 데 부채질’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집까지 태우지 않았지만 집안 식구들이 많이 놀랐다.

  불난 것 못지않게 밤에 문제가 생겼다. 저녁밥을 먹으려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과 밤늦게까지 놀고 있는 줄 알고 찾으러 다녔지만 아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0아!”

  “울 00이 어딨 다냐?”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손에 등불을 들고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로 애타게 부르는 엄마와 고모의 목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작은방 구석에 무당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움츠리고 숨어있는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할머니였다. 전날 먹다 남은 감춰둔 찹쌀떡 두 개를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머니와 고모는 아이를 찾으러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작은방에 있는 걸 보고 안심된 모양이다. 고모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라고 조카를 무척 귀여워했다.


  “오빠, 너무 혼내면 애가 밤에 자다가 놀라요. 그냥 놔둬요”

  다행히 아이를 감싸준 사람이 많아서 그날 밤 매 맞는 일은 피했지만, 내가 집에 불을 지른 아이라는 사실은 온 동네 사람들에게 화두가 됐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반세기가 훌쩍 지나 그곳에 왔다. 대가족이 함께 살았던 옛 추억이 깃든 고향집은 간 곳이 없다. 가을이면 감나무 가지마다 풍성하게 열린 빨간 감, 어머니 주머니를 풍요롭게 채워주었던 감나무는 베어진 그루터기만 남아있다. 맑은 물이 흐르던 실개천은 모래를 채취해 간 흔적 때문에 흉물처럼 큰 웅덩이로 변했다. 까치가 날아들던 마당 옆 소나무도 사라졌다. 아이가 기억하는 그날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감이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나는 할머니 환갑 다음 날 벌어진 방화사건 속 일곱 살 아이로 돌아간다. 집에 불 지르고 없어진 줄 알고 딸을 찾던 어머니의 애타는 목소리는 지금도 메아리처럼 아련히 들려온다. 쓸쓸한 발길을 돌리려는데 돌 틈 사이를 뚫고 얼굴을 내민 민들레가 햇볕 아래 반짝이며 미소로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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