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가을 햇살보기가 극히 드물다. 예전 같으면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한낮에는 따가운 햇볕에 가을 곡식이 알차게 영글고, 먹음직스러운 과일은 예쁜 빛깔로 익어가는 마음까지도 풍요로워지는 계절이다. 삭막한 도심의 사람들에게도 느낌으로 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한여름의 우기철처럼 날마다 뿌리는 가을비는 추석이 왔지만 지난여름 수해 재난을 겪었던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흐린 날보다 더 어두운 명절을 맞이할 것이다. 살던 보금자리가 없어진 그들에겐 명절은 가족과 친지가 모인 기쁨의 날이 아닌 제대로 명절 준비를 할 수 없는 현실이 그들에겐 괴로운 멍에가 되었으리라. 이렇게 명절에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은 꼭 그들만이 아니라도 내가 근무하는 요양시설에도 수 없이 많다. 평소에 면회 안 오던 환자 가족들도 명절에는 집에서 준비한 음식 싸가지고 한번씩 왔다 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 보호자나 어떤 사정에 의해 못 오는 환자 가족들도 있다.
다른 환자 가족들이 오면 부러움과 외로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나타난다.
추석 다음날 옆 병실에 입원한 K가 오후에 살며시 우리 병실에 왔다. 복도에서 만날 때는 타고 있는 휠체어를 멈추고 손을 꼭 잡으며 몹시 반가워하는 환자다.
얼마전에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중환자실인 우리 병실로 왔는데,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우리 병실로 이송 됐다. 말을 하거나 감정표현을 하는 환자들은 습관과 성품 파악 하려면 며칠 동안 환자와 마찰이 생길 수 있다. 밤에 혼자서 화장실에 가다 넘어지면 골절로 이어지기 때문에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그에게 무척 애를 먹었다. 억제보다는 자유롭게 놔주자 특별한 이상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감정 기복이 심하고 쉽게 흥분하며 부인과 통화하고 싶다며 간호사실에 가서 전화해달라고 하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간호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어눌한 말씨로 항의를 하는 모습을 가끔씩 봤었다. 그 환자에게 병실생활의 규칙을 말해봐야 통하지 않고 내가 환자에게 맞추어야 마찰이 없을 것 같았다. 자기의 물건은 차곡차곡 정리하고 상자에 넣었다가 사물함에 위에 다시 진열했다 거둬들이는 습관이 있었다. 마치 노점상 좌판을 차리듯 세숫비누 샴푸 머리빗 볼펜등 자기 물건들을 즐비하게 침대 머리맡에 진열하고 거둬들이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다. 우리 병실에 있을 때는 부인한테 전화해 달라고 조른 적 없이 적응을 잘했다.
2개월 정도 있다가 몸이 회복되자 K는 다시 일반 병실로 갔다. 휠체어 타고 지나가다가 우리 병실 앞을 지나면서 씩 웃으며 슬며시 들어와 보곤 했다. 추석 며칠 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가는 모습을 봤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도 못 본 체 휙 지나가 버렸다. 뭔가 기분이 상당히 나빠 보였다. 기다리던 부인이 면회 오는 날짜가 길어지자 흥분했던 것 같다.
추석에는 그래도 명절이라 부인이 딸과 아들을 데리고 그가 좋아하는 콜라와 커피를 준비해서 다녀갔다. 가족들을 봐서 기분이 좋았던지 슬며시 웃으며 우리 병실에 와서는 환의 옷섶에서 숨겨가지고 온 콜라 한 병과 커피믹스 4개를 내 손에 쥐어줬다. 먹고 싶으면 언제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나 왔다가야 생길 수 있는 것인데 자기 먹을 것을 줄이고 내 몫을 챙겨가지고 왔다. 고마운 마음 알겠으니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괜찮아 괜찮아”를 하면서 내손에 놓고 돌아섰다. 같은 병실에 있지 않으니 내게서 어떤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콜라 한 병과 커피 4개는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전부에서 자기 몫을 줄이고 남에게 선 듯 주는 그 마음이 아름다웠다. 그에겐 특별한 식품인 소중한 음료수를 남들 보지 않게 숨겨 와서 내 앞에 놓고 갔다.
K의 부인은, 혼자 벌어서 자식 교육 시키고 남편 병원비를 대느라 쉽게 면회 올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부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언제 콜라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인데.....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과연 조건 없이 나눔을 베푸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멀쩡한 지능을 가지고 속고 속여 먹는 세상에 온전치 못한 몸과 뇌 손상으로 떨어진 지능 때문에 사고력과 이해력이 떨어졌지만 한때 우리 병실에서 마음 편히 있었다는 인연으로 그가 베푸는 자비였다. 커피와 콜라를 동료들과 같이 나누어 마시며 K에게 고마움을 전했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세상은 결코 삭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인연도 살아가는 생활의 일부이고 살아가는 재미이다. 이런 훈훈한 마음이 널리 퍼지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