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운지 나무들은 푸른 잎으로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잎새 사이로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거리며 살포시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는다. 싱그러운 나뭇잎이 춤을 추며 움직인다. 새들이 앉았던 흔적의 표시다. 하늘에는 회색빛으로 뿌연 미세먼지를 가득 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카시아 꽃이 산허리를 하얗게 색칠한다. 아침 해뜨기 직전과 해넘이 때 향을 발산하는 아카시아는 팝콘처럼 터트린 하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긋한 내음이 옛날 시골집 옆 산에서 아침마다 향을 실어다 준 고향 집의 추억의 향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순백의 꽃으로 옷을 입은 아카시아는 오월의 잠자는 어린 시절 추억을 향기로 실어왔다.
고향 집을 감싸고 흐르는 냇가 옆에 편편한 작은 산이 있었다. 말이 산이지 나무가 심어진 작은 들이었다. 산에는 소나무와 아카시아가 어우러져 오월만 되면 아카시아 꽃으로 집 주위를 하얗게 둘러싸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에 실려 온 향기는 집에 향수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유달리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였다. 밥을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술을 안 드시고는 견디지 못했다. 노동력이 필요한 농번기 때 한밤중에라도 술 담그는 일은 할머니가 맡아서 했다. 차좁쌀과 쌀을 섞어서 물에 불린 후 시루에 찐다. 고두밥이 식으면 누룩을 섞어 이스트를 넣고 물을 배합한 후 항아리에 담아서 이불을 씌운 다음 아랫목에 둔다. 일주일 정도가 되면 술 익는 냄새가 방안에 진동한다. 술 익는 냄새에 아버지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서렸다. 봄에는 가끔 소나무 햇순을 따서 술을 담을 때가 있다. 막걸리에서 향긋한 솔잎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버지의 새참은 막걸리였다. 안주도 변변찮은 김치 쪼가리에 불과해도 논에서 쟁기질을 하다가 막걸리 주전자를 가지고 간 내 모습이 보이면 쟁기를 끄는 소를 몰면서도 자꾸 주전자를 든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딸이 반가운 게 아니라 내 손에 든 막걸리 주전자가 반가웠던 셈이다. 논둑에 걸터앉아 시원한 막걸리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은 하루의 행복이었다. 들에서 일하다가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술 냄새를 맡으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평생 농사일을 해 오신 아버지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은 술이었다. 힘든 농사일을 하려면 감당해 내야 할 노동력을 술이 뒷받침을 해준 셈이었다.
한낮 햇볕에 시든 풀처럼 지친 몸으로 쟁기를 지게에 지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항아리에서 퍼온 막걸리를 체에 거르기 시작한다. 시원한 샘물을 퍼다 거른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켠 아버지의 얼굴은 비 온 뒤의 나무처럼 금방 생기를 되찾았다. 술만 마시면 힘이 솟는다는 아버지는 술은 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힘의 원천인 영양제인 셈이었다.
어머니가 이른 아침 집 옆 산에서 아카시아 꽃을 큰 바구니에 가득 따오셨다. 바구니에는 꽃 속에 향기를 가득 채워왔다. 꽃을 씻어서 물기를 빼놓았다. 술 담을 때 꽃을 넣어서 담으면 맛과 향이 일품이라는 말을 듣고 술을 담기 위해서란다. 아카시아 꽃을 설탕에 재워서 일 년 동안 땅속에 파묻으면 땅속에서 꽃이 설탕과 어우러져 발효되면 술이 된다는 거였다. 땅속에 묻힌 술 항아리를 두고 아버지가 과연 일 년 동안 참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술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서 반년도 못 되어서 아버지는 항아리 묻은 곳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항아리 속에든 설탕에 절은 아카시아 꽃 속을 휘젓자 베이지색 액체는 달콤한 술 냄새를 풍겼다. 어머니는 꽃술을 한 컵 떠서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 얼굴은 맛있는 표정이 아니다.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다. 반년 동안 참고 기다렸던 기대한 술맛이 아니었다.
“이건 술이 아니라 설탕물이다.”
아카시아 꽃이 설탕에 재워서 땅속에서 일 년 동안 있으면 몸에 좋은 명약이 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만든 아카시아 꽃술은 아버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명약이라도 본인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듯이 아버지는 아카시아 꽃술을 소주에 섞어서 드시면서 막걸리 맛에 미치지 못하다고 하셨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면 꽃잎 주변에 꿀벌들이 웅성거린다. 양봉업자들이 아카시아 꽃을 따라 꿀을 채밀하러 온다. 벌통을 놓고 방호복을 입은 다음 얼굴에 그물로 뒤집어쓰고 꿀을 채밀하던 양봉업자는 꽃을 따라왔다가 꽃이 지면 채밀한 꿀통을 챙겨서 벌통과 함께 사라진다.
하얗게 피어난 아카시아 꽃을 보면 바구니에 가득 담은 꽃으로 술을 담그던 어머니의 옛 모습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꽃 속에 든 꿀을 빨아먹으려고 꽃을 따서 먹던 추억의 꽃.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잔잔히 흐르고 냇가에 흐르는 맑은 냇물 소리를 들으며 진한 향기가 아침저녁으로 바람에 실려 오던 고향 집 아카시아는 오늘도 진한 향기를 내뿜으며 팝콘 같은 하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서 있겠지. 아버지가 떠난 고향 집 옆 산에는 지금도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