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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 노트

홍화(紅花)

by 훈자까

'도장은 쉽게 찍는 것이 아니다.'는 문장을 새겨두고만 있다가. 하루에 수백 번도 도장을 찍게 된 날들이. 조금은 갑작스럽게 다가왔었다. 처음엔 두려웠다. 날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내가 누군가와의 대화와 교류에서 숱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래서 맞닥뜨리는 실수들마다 성장통이 더욱 아프게 사무쳤다. 밤잠을 주에 몇 번씩이나 설칠 정도로, 힘겨웠다.


어느덧 만나던 모든 이에게 잘하고 싶다는 내 마음만큼 치열했던, 여름이 가고 선선한 계절이 왔다. 날이

시원해서일까, 만났던 분들은 오히려 그 가올바람 속에서. 나를 따뜻하게 해 주더라. 작은 웃음과 둥글한 말투에 섞인 건 온정이었다.


그렇게 어떤 시원따뜻한 하루가 끝나고, 인감을 찍던 와중 보인 그 모양이 마치 붉은 꽃 같았다. 여름의 더위를 이겨내고 선선한 가을 속. 그제야 알게 된 온정으로 피어난 꽃처럼 말이다. 지루한 일과였던 내 책임의 행동과 결과물은, 뒤돌아보니 꽤 근사한 화원을 꾸렸더라.


그때부터 두려웠던 책임, 붉은 꽃씨를 다듬는 작업이 퍽이나 기뻐졌다. 책임감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보상심리와, 그에 더한 인간적인 행복감이. 나를 더 온건한 책임감이 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 업무의 화폭도, 결국 사람에게 신뢰와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난 이 점이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도,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산책길을 만들어주는 일로 이어지는 게. 꽃들이 만개한 그 길을 조금은 눈물겹게 바라보는 지금일까.


과거부터 이어지던 인연도. 언제 어느 때에 만들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만남에도. 난 꾸준하게 감정의 꽃을

피워야겠지.


누군가를 위한 마음도, 그 마음이 흘러서 적힌 글도. 피어나는 감정과 웃음, 말과 행동도.


그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니까. 그리고 이것들이 모여서 피어난 한 송이의 모습이. 나뿐만이 아니라 어떤 이에게도 유려하게 담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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