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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Apr 02. 2023

적응의 쳇바퀴

생각 노트 #25

 볼품없고 칙칙한 핏덩이가 있었다. 생각만큼은 확실하게 잡혀있고 남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그런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게으르고 작은 짐승이 있었다. 한심한 허영심을 품은 채 말이다.


 현실이 잠깐 살갗에 스쳐 지나간 걸까. 문득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뒤죽박죽으로 가득했던 것들을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행동으로 말이다. 거기엔 건방진, 절대적 믿음이 있었다. 나는 어떠한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잠깐 현재의 시선에서 본다면. 항상 긍정적인 결과가 따라왔다. 그러나 자만심은 잠깐일 뿐, 망각과 적응이 뒤따라 왔다.




 울타리를 벗어난 핏덩이의 눈에는 두려움이란 동공이 부착되어 있다. 


 그러다가, 무언가 됐다. 생각한 것들이 아주 사소하게 이루어졌어도 큰 쾌감을 느꼈다. 당장 헐벗은 몸과 바닥 친 자존감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지속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두통을 동반하는 큰 괴리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내가 입은 무언가를 거칠게 버렸다. 좋은 경험 했다는 식으로, 쓴 맛을 봤다. 지평선은 아름다우나 빠지는 순간 고배를 마시는 법이었다.


 이제는 조금, 내가 입을 옷에 대한 판단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잠깐 옷을 입어 봤다고, 거대하고 긴 나태가 찾아왔다. 센과 치히로의 배경에 딱 맞는 가축이 되어갔다. 그러던 와중 나만의 작은, 하얀 설원을 받게 되었다.


 허영을 현실로 바꿀만한 힘이 있는 소중한 땅이었다. 푸르륵 소리를 내며 약간의 눈물을 흘린 것 같다. 덕분에 흐릿한 먹으로 꿈이라는 걸 심었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뛰놀 수 있는 설원이 나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그렇다고 나태가 뚝 끊어지지는 않았다. 일차원적인 쾌락에 차오른 추악한 것들은 나를 더더욱 잠식되게 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거울을 보여줬다.


 '너, 자기 비하가 엄청 늘었네.'


 그 말 한마디에 내 안의 나태를 모두 게워냈다. 건강한 신체에 맑은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오롯이 신체를 위한 스스로의 훈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몇 달. 정말로 건강한 신체에는 상쾌한 정신이 깃들었다. 기쁜 소식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는가. 남들이 봐도 썩 괜찮은, 옷을 대여할 기회가 왔다.


 당연히 마다하지 않았다. 설원에 대한 열망은 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좋았다. 나태로만 뒹굴거렸고, 가진 것은 허영심 밖에 없던 나에게 과분한 현실과 시선들이 다가왔다.


 설원 또한 더욱 알차게 채워져 갔다. 당시에 일어났던 번뇌도, 설원에 쓰이는 순간 하나의 조형물이 되고 건축물이 되었다.


 그때는, 행복한 것이었다. 꿈과 생활, 미래를 위한 대비까지 모든 것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무사히 대여한 옷을 반납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후임자에 대한 응원을 건네는 기특한 행동과 함께 말이다. 꽤 수직적인 발전이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과 함께 자신감에도 엔진이 달렸다.


 여유로운 휴식과 함께 더욱 만족스러운 옷가지를 위한, 탐색의 쳇바퀴가 시작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덜컥, 더더욱 멋져 보이는. 내가 그리지도 못한 옷을 입을 기회가 찾아왔다.




 호화롭고 반짝이는 것들에 눈이 부셨다. 무언가 모를 어색함이 있었다. 하지만 입지 않을 이유를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군침보다는 불안감에 움츠려 시작한 이 일이 어느덧 반년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그래, 나는 도저히 이 일로는 미래를 그릴 수 없다.




 생활만큼은 어느 누가 봐도 좋다. 불평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시간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꿈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이 옷을 입은, 꿈의 장면에서의 내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번뜩하고 생각이 차올랐다. 옷을 입는 행위 자체도 결국 쳇바퀴였다. 작은 쳇바퀴의 시선에 갇혀 천장을 꿰뚫을 통찰을 가지지 못했다.


 지금의 생활에서 황금 단추를 많이 모으기로 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굴리듯, 이 단추들은 꿈의 겨울나기를 위한 식량들이었다. 열망이 쬐어 허영이 꽃피는 봄이 찾아올 때까지, 이 두꺼운 옷을 버텨볼 것이다.




 그리고 벼루는 점점 말라갔었나 보다. 설원의 문을 덜컥 연 오늘, 반가운 밤이 다가왔다.


 매일 함께 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난 이 깜깜함에서 붓을 쥐었고 행성을 그렸다. 그리고 그린 시간들은 먹처럼 하얀 종이에 흘러내렸다.


 나는 여기가 맞다. 설원에서 뛰노는 게 내가 살아있음을, 두근거림을 느끼게 한다. 


 난 나답게 살고 싶고, 이 하얀 길을 따라 성공하고 싶다.


 별빛이 내리는 하얀 봄의 길에 새하얀 옷가지를 정돈할 나를, 정말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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