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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08. 2024

스페인의 동전 시루떡 '아마르기요'

- 걷기 17일 차 -

순례길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까닭에 산티아고의 심장이라 불리는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를 떠나는 날이다. 날씨는 맑으나 드센 바람에 여우비까지 뿌린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차로 이동해야겠다. 발 상태를 살핀다. 걷기는 어제와 비슷하게 버겁지만 발목의 부기가 조금 빠져 보인다. 좋은 징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상황을 봐야 되지만 웬만하면 이젠 천천히 걸어야겠다. 걷겠다고 길 위에 선 도보 여행자는 걸을 만하면 무조건 걷는 게 옳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유명한 빵집이 이 동네에 있다고 들었다. 먼 이국을 어렵게 왔는데 빵 하나 못 사 먹을 내가 아니다. 더구나 유명하다는데. 

빵집 문 여는 시간을 고려해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발하지만 나름 시간 계산을 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늦게 가면 다 팔려 살 수 없다는 제일 유명한 쿠키 ‘아마르기요’를 사기 위함이다.      


꼭 우리나라의 50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였다. 쿠키라는데 막상 먹어보니 빵인지 떡인지 과자인지 캐러멜인지 헷갈리는 식감이다. 쫀득함이 재미있어 혼자 웃지만, 우리나라 백설기와 비슷한 맛의 이것이 왜 유명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입맛엔 시루떡을 한 입 베어 먹는 것 같이 익숙한 맛이다       



날씨 때문에 을씨년스러워진 길을 전 부장과 차로 이동한다. 가끔 보이는 순례자들이 비옷으로 온몸을 싸맨 채 웅크리고 걷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아 안쓰럽다. 차로 이동하는 내가 송구스럽기도 하다.

중간 마을에서는 짐을 자전거 뒤에 싣고 달리는 순례자와 마주쳤다. 자전거 순례자들도 어김없이 가리비를 자전거 뒤에 매달아 자신이 순례자임을 표시한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씽씽 쌩쌩 잘도 달린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전거 타기가 덜 힘들고 재미있기 때문인지 걷는 순례자보다 더 유쾌해 보인다는 것이다. 서양인의 크고 날렵한 체격이 자전거와 한 몸으로 달리니 생동감이 느껴져 보기가 좋다.       


오늘 머무는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는 마트도 편의시설도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조용한 마을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다가 공터에 서 있는 이동도서관 차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동도서관이 농어촌처럼 책을 접하기 어려운 문화 소외지역으로 다니는데 스페인도 비슷한가 싶었다. 반가움에 무작정 올라타고 인사를 한 후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나를 한국에서 온 사서라고 했더니 순례길의 사서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마주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길 위에서, 알베르게에서, 바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비슷한 일상을 반복한다. 어느덧 걷는 일정이 중반으로 접어드니 사람들의 면면이 보인다. 나이와 상관없이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도 간혹 있다.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세상은 요지경이다. 지금의 내 생각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누군가는 또 나를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꼴불견 순례자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라푼젤 언니와 알베르게의 Bar에서 산미구엘 맥주로 세상 얘기를 나눴다. 나는 평생 사회생활을 해왔기에 누군가를 부를 때는 항상 직함으로 호칭하는 것이 익숙하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언니가 생겼다. 불편한 나와 보조 맞춰 걸어주고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니 언니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마치 내 친언니 같았다. 나도 모르게 라푼젤 언니에게 스며들었다.     


스페인의 한적한 시골에서 마시는 필리핀 맥주가 맛나다. 파고 들어가면 산미구엘 맥주는 필리핀 맥주지만 스페인과 통한다. 이 맥주 회사는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이던 1890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지역 최초의 양조장이었으며, 양조 산업의 선구자로 설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는 ‘산 미겔의 독수리’라는 칭호도 부여했다. 이런 일련의 관심 속에 산미구엘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스페인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나도 지금 마시고 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여서 더 입에 감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진 이웃의 응원, 이것은 언제나 없던 기운도 생기게 한다. 끝까지 지치지 말고 잘해 나가자. 

    

* 걷기 17일 차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27km / 누적거리 406.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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