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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23. 2024

때 이른 첫눈이 내리다

- 걷기 26일 차 -

까까벨로스 출발부터 잔뜩 찡그린 날씨가 마음에 걸렸다. 이 길은 고난의 길임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씨의 변덕이 잦다. 나도 그렇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여전히 아침 날씨가 으면 기분이 가뿐하고 날씨가 꾸물거리면 침울해진다. 오늘은 비 올 확률이 90%라니 영락없이 비를 만날 것이다. 그런 만큼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한다.

      

목적지 ‘베가 데 발까르쎄’를 가려면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를 거치게 된다.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예전에 방영됐던 TV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이 운영되던 도시이다. 전혀 모르는 도시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봐온 터라 마치 잘 아는 곳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가 기대감에 마음이 울렁거린다.      


이곳에서 배우 차승원, 유해진, 배정남 님이 까미노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알베르게를 운영했다. 한국식 밥과 안락하고 포근한 잠자리의 제공으로 프로그램에서 온기가 느껴지던 현장. 그곳을 찾아가 그때 방문했던 순례자들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마침 눈에 익숙한 커다란 철제 대문이 열려 있다. 한국식 알베르게인 스페인 하숙 앞에서 기웃거리던 순례자처럼 주춤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다는 게 마냥 신기하다. 그런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초록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 배우 유해진 님이 씩~ 웃으며 크레덴시알에 쎄요를 찍어줄 것 같은데 공사용 낮은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다. 멋있던 스페인 하숙은 오간데 없고 수리 중인 낡은 알베르게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세 배우의 배웅을 받으며 산티아고를 향해 떠나는 순례자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토록 멋지게 보이던 곳이 이렇게 낡은 곳이었다니. 우리나라 방송국의 촬영 기술과 편집 능력에 엄지를 쭈~욱 올린다. 그리곤 그들이 장 보러 나가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예 모르던 곳이었다면 바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거쳐 지나갔을 마을인데 뭔가 허전하다. 아쉬움에 세 사람이 장 보러 나오면 햄버거를 사 먹던 바를 찾아가 에스프레소에 곁들여 추로스를 초코시럽에 찍어 먹고 일어났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마을도 거리도 내 마음도 젖어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 하는 사이에 비는 함박눈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11월 중순에 때 아닌 눈이 내린다. 첫눈이다. 그러나 비 온 뒤에 내리는 눈에서 순결함이나 고결함을 찾을 수는 없다. 내림과 동시에 젖은 길 위에서 스러져 사라진다. 스페인 하숙을 끝낸 그곳에서 세 배우의 멋짐을 찾는 것처럼 허망하다.      



‘베가 데 발까르쎄’의 알베르게 앞뜰에도 결정체 없는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일기예보에서는 폭설이 내릴 거라 했단다. 다리가 성치 않으니 눈이 내려 기쁘기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움직임이 더 둔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심란함을 감추기 위해 난로 앞으로 다가앉는데 난로에 불을 지피던 초로의 프랑스 순례자가 아는 척을 한다.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통증이 심해 잘 걷지를 못한다고 했더니 말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온다. 손에는 분홍색 테이프와 가위가 들려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리에 문제가 없었다며 아픈 내 다리에 테이핑을 해 주고, 뱅쇼를 끓이더니  계속 마시도록 친절을 베푼다. 국내에서 마시던 뱅쇼와 확연히 다른 맛이라 끓이는 법을 물어봤다.    


“레드와인, 오렌지, 계피대, 바닐라를 10분 정도 팔팔 끓이다가 약한 불로 15분쯤 더 끓인 후 설탕을 타서 마셔요. 그럼 감기나 피로해소에 최고예요.”  

    

곁에 있던 아름다운 아가씨가 알려준다. 그의 딸이었다. 까미노길이 열다섯 번째라는 아버지는 딸이 4살일 때부터 데리고 다녔단다. 그래서 딸도 이번 걸음이 열네 번째란다.  


알베르게 벽에 걸린 그림 속 여인보다 더 매력적인 딸은 길 위에서 스페인 남자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젊은이에게 연신 뽀뽀를 해대는 딸과 그녀의 행동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는 아버지가 참 흥미롭다.        


까미노길의 순례자들은 같은 목적으로 한 곳을 바라보기 때문인지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도와준다.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표정과 행동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순례자나 그의 딸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게다. 감사하다. 지금의 이 기분이 그대로 발로 전달이 되어 빨리 컨디션 회복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받은 것처럼 나도 다른 순례자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다.     

  

* 걷기 26일 차 (까까벨로스~ 베가 데 발까르쎄(Vega de Valcarce)) 26km / 누적거리 6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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