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드로우소에서 산티아고로 들어오는 날, 아르수아를 출발할 때부터 엄청난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기쁨의 언덕(Monte do Gozo)에 다다를 때까지도 폭풍우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성이 난 바람과 쏟아지는 빗줄기에 내 한 몸 건사가 버거울 만큼 휘청거렸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에 급급했다. 아픈 발목의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기가 에워쌌다. 그 순간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빗줄기는 지금까지 사람 노릇 못했던 것을 질타하는 듯 사정없이 몸을 때리면서 내리 꽂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시원했다. 웅크렸던 몸을 바로 세우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의 찌든 때를 씻어 주소서!’ 간절히 바라며 온몸과 마음으로 비를 맞았다. 후련했다.
산티아고가 가까워지자 빗줄기와 바람이 잦아들더니 맑아지기 시작했다.
라푼젤 언니와 여수 형님과 난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다 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산티아고 땅을 밟았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감격스러웠다. 제니퍼가 뛰어오는 게 보일 때부터 흐르던 눈물은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오열에 가까운 울음으로 바뀌었다. 눈물은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을 씻어내고 있었다. 환희로웠다.
대성당 앞 곳곳에서 환호가 터지고, 축하인사가 오가고, 너나없이 서로를 축복하느라 분주했다. 나도 수 없이 만나고 헤어졌던 얼굴들과 포옹을 하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서 기뻐하던 순례자들이 야곱을 따라 이 길의 역사를 써왔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광장에서 기쁨을 나누는 우리도 축제 분위기의 이 순간을 역사로 쓰고 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써질 것이다.
산티아고는 12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곱’을, 꼼포스텔라는 ‘별들의 들판’을 뜻한다. 나는 오늘 최종 목적지인 성 야곱이 묻혀 있는 별빛 들판,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했다. 프랑스 생장을 출발한 지 34일 만에 이루어진 마무리이다.
가장 먼저 전사의 야곱에게 인사를 드렸다. 제니퍼가 젖은 솜처럼 무거운 내 배낭을 받아주며 인사드리는 위치까지 안내해 주었다. 광장의 가운데 즈음에는 산티아고의 상징인 가리비 문양이 음각된 위치가 있다. 그 가리비에 손바닥을 대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전사의 야곱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 이 의식은 순례를 마치고 광장에 들어서는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행하는 예식이다. 발목이 아픈 내가 그 발목을 젖혀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는 게 경이롭기만 하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지배할 당시의 일이다. 글라비오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백마 탄 야곱이 하늘에서 내려와 무어인을 처치해 주었단다.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때였다. 그 후 전사의 야곱은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전사의 야곱’에게 도착 인사를 드린 후 맞은편에 있는 ‘순례의 야곱’에게 인사를 드렸다.
백마를 타고 칼을 높이 쳐든 전사의 야곱은 대성당 맞은편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순례의 야곱은 대성당 꼭대기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성당은 화강석으로 지어졌다. 갈리시아의 화강석이다. 종탑은 높이가 높아 우러러보듯이 고개를 빼들고 올려보아야 한다. 성당 건물 중앙의 다이아몬드형 계단은 묵직하니 우람해 당당하기까지 하다.
이 대성당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가톨릭 3대 성지로 이름이 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성당이 되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폰소 6세 때 건축을 시작했으나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해 12세기에 끝났다니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완주증을 발급받기 위해 대성당 인근의 순례자 사무소를 방문했다. 2유로의 기부금을 내고 순례증서를 발급받고, 다시 3유로의 기부금을 낸 후 도보 순례 거리가 적힌 완주증서를 받았다.
한 손에는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다른 한 손에는 완주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날아갈 것만 같다. 나중에 성한 다리로 다시 걸을 기회가 오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는다.
대성당이 공사 중이라서 본당 옆의 성당에서 순례자를 위한 정오미사가 진행되었다. 보통은 대성당에서 매일 12시 정각에 순례자를 위한 향로 미사를 진행한다. 향로 미사는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땀 냄새를 없애고, 몸을 연기로 소독해 주기 위해 시작됐다고 알고 있다. 향로를 20m 높이에 매달아 그네를 밀듯이 밀어서 성당 안을 움직이게 하는데, 속도가 최대 65km에 이른단다. 이때 향로의 높이는 1.5m이고 무게는 53kg이나 된다니 대단한 의식이다. 그러나 지금은 접근이 불가능해 주변을 배회하다 돌아선다.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밤, 조용히 비가 내린다. 판초 우의를 걸치고 바지는 걷어 올린 채 슬리퍼를 신고 대성당을 다시 찾았다. 야곱을 만나기 위함이다. 라푼젤 언니와 전 부장이 함께 해 밤의 두려움은 없었다.
빗소리 가득한 성당의 한쪽 벽에서 그림자로 머무는 성 야곱을 만났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경이로움이다. 어찌 벽의 돌기둥 그림자가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는 야곱으로 보인단 말인가.
마음이 개운하다. 그의 정신이 이 길 위의 순례자들에게 빛이기를 희망한다.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고 아프지만 많은 시간 행복했다. 부엔 까미노!!!
* 걷기 34일 차 (뻬드로우소~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20.5km /누적거리 80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