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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ug 22. 2020

XYZ : 얽힘

형편없는 제목

 누군가 나에게 왜 글을 쓰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는 나를 짓누르는 비난이 섞여 있다. “네가 쓴 글은 형편없으며 그 누구도 찾아 읽지 않는 글이지 않니?” 옳다! 현재도 미래에도 내 글은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침묵할 따름이다. 허나 오해해서는 안된다. 나의 침묵은 패배자의 얼굴을 띄지 않는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미소를 띠고 있으며 한껏 우쭐해져 있다. 재수 없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애써 침묵을 하는 것이다. 알고 있다. 정신병자로 보일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정신병자인가? 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 사르트르의 글을 접하고 그 같은 고민이 해소되었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작가는 글을 쓸 때 200명, 300명밖에 안 되는 독자들을 상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글이 모든 사람에게 읽혔을 때 이루어지는 변화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이 작가다. 실로 명쾌한 작가론이다. 글을 써 내려갈 때 느끼는 흥분과 도취를, 그 느낌을 잘 풀이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작가론은 틀렸다. 세상에는 몇 안 되는 지인들이 편하게 읽을만한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고지식한 사르트르는 그들을 작가라 할 수 없다면서 호통을 치겠지만 나는 그들도 작가라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이 쓴 책을 읽을 때면 찢어버리고 불태우며 욕을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작가인 것이다. 작가란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사물로 만들겠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이며, 사물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가 글인 자들이다. 더 이상의 요구는 잔인하다. 애처롭고 나약한 작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재밌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작가가 아니라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잔인하다. 그러니 사르트르여 형편없는 작가를 욕하는 나의 재미를 빼앗지 말라.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형편없는 제목 아래 써 내려가야 한다. <X Y Z : 얽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X, Y, Z는 세대를 구분하는 용어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X세대는 1970년생, Y세대는 1990년생 그리고 Z세대는 2000년생을 표명한다. 3개의 각 세대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차이점이 꽤나 명확하게 보이는 듯하다. X세대는 젊은 시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해가는 과도기를 겪었으며 Y세대는 디지털 시대를 누렸다. Z세대는 IT 즉 소프트웨어의 폭발적인 성장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라 할 수 있다. X세대는 급속도의 경제 발전 속에서 태어나 꽤나 풍요로운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그 결과 구세대와의 삶의 태도가 달라졌으며 문화 괴리현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흔히 말해 ‘젊은것들은 싸가지 없다.’는 말은 이들에게 가장 많이 쓰였다. Y세대는 X세대와 달리 경제 성장이 정체되어있는 시기를 누린다. X세대 이후 유독 확고해진 자본주의 시스템은 Y세대를 짓누른다. 점점 심해지는 경쟁과 개인주의는 많은 이들을 자살로 몰고 가기도 했다. Y세대는 취업난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니트족, 88만원 세대 혹은 N포 세대 등의 별명이 붙었다. 이러한 Y세대는 X세대가 누렸던 풍요로움을 비난하며 세대갈등을 보인다. 이렇게 Y세대의 패륜적 모습에 Z세대가 부각된다. Z세대는 새로운 인류로 여겨지며 희망을 주는 세대가 된다. Y세대는 Z세대에게 줄팽이, 퍽치기, 벨튀도 모르는 무지한 세대라 놀리지만 오히려 Z세대의 그러한 무지는 신인류로서의 후광을 키운다. 이미 기성세대가 된 X세대는 Z세대를 고려하여 교육시스템을 변화시키려 한다. Z세대가 진정 신인류로서 다른 모습을 보이길 바라는 것이다. 또한 아시아 국가 중 하나인 한국으로서 오랫동안 시달렸던 문화 열등감이 Z세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G드래곤, 싸이, BTS, 블랙핑크 등으로 대표되는 K팝 전성시대는 한국이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Z세대는 그러한 시기를 당연하게 누리게 된다. X세대가 Z세대에게 갖는 기대감, Y세대가 Z세대에게 느끼는....... 아 지루하다.

 그만하련다. 이렇게 세대를 구분 짓는 짓 따위 그만하련다. 세대를 구분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구분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이따위 짓이 무척이나 재미지나 보지만 나에겐 혈액형별 성격을 나누는 짓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A형, B형, O형, AB형을 구분 짓는 수많은 논리와 연구는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이기적이며 O형은 더럽다로 결론지어진다. 심지어 AB형은 미친놈으로 분류된다. 사람들은 누군가 꼼꼼한 모습을 보일 때 그 사람에게 “너 A형이지?”라고 묻지 않는다. 소심하게 굴 때 A형이냐는 질문이 거칠게 던져진다. 모든 혈액형은 이와 같이 취급당한다. 이렇게 대다수의 구분 짓는 행위의 저의에는 구분된 대상의 결함을, 형편없음을 지적하려는 욕망이 깔려있다. 남자와 여자를 애써 구분 짓는 저들을 봐라 거품을 물고 서로의 단점을 지적한다. 반면에 남자, 여자라는 구분이 모호한 자들은 여자 옷을 입어가며 히히덕대거나 숏커트를 하며 으스댄다. 흔히 그러한 자들을 성 정체성이 흔들리는 자들이라며 매도하거나 이성적 사고가 부족하다며 천박하게 여긴다. 성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 비난받을 짓인가?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다만 그 사람이 여자일 때도 남자일 때도 있는 것이다. 이 당연한 이치는 죽어라고 거부당한다. 성에 대한 두려움, 섹스에 대한 두려움이 남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더듬을 때 그 모든 더듬거림이 권위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언제쯤이면 섹스가 오롯이 섹스로 여겨질 수 있을까? 서로의 몸 구석구석을 탐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더듬거림이 언제쯤 강간의 이미지를 벗을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기보다 섹스와 강간을 철저히 구분 짓는 것이 시급하다. 이성적 사고가 부족하다고? 그들도 서로의 아랫도리를 깠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구분할 줄 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끌림이라는 행위에 이보다 더한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려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풍기는 꽃내음에 이끌릴 때, 그 꽃을 손에 쥐고 향기를 맡을 때 무슨 이성적 능력이 필요한가? 그 꽃의 가시를 피할 수 있는 이성이면 충분한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구분 지으며 자못 똑똑한 척하는 자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지 나이가 서로 다른 사람 간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입장의 차이 또 그 차이에 의해 서로 헐뜯는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책 제목을 <X Y Z : 얽힘>이라 지으며 자신의 센스에 감탄하는 무지몽매한 자를 비난하는 것이지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형편없다고 비난하는 감각은 권장돼야 한다. 다만 그 비난이 쉽게 행해지면 안 된다. 나는 그 ‘쉽게’에 방점을 찍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호흡을 하는 자들을 X세대, Y세대, Z세대로 구분 짓게 되었을 때 서로 간의 헐뜯음은 재미지기도 하며 쉽게 행해진다. 각 세대의 특징을 묘사한다며 나열되는 논리들은 누군가를 X세대로 규정하고 누군가를 Y세대로 규정시킨다. 그렇게 자신들이 X세대, Y세대, Z세대라며 거수한 자들은 그 단어에 속박된다. 그 이후는 묶인 채로 서로를 발길질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쉽게 비난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을 특정한 것으로 규명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화가 오를 대로 오른 사람이 읊조리는 대사를 봐라. “야이 씨발놈아”, “창녀 같은 년”, “개새끼야” 등 순식간에 상대방을 특정한 인간 유형으로 몰아 댄다. 어쩌면 내가 예시로 든 대사들이 너무 일상적이라 아무 의미 없는 외침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제 좀 더 디테일 해져 보자. 화대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에게 누군가 “창녀 같은 년”이라 읊조린다면?  장애인 판정을 받아 당당하게 장애인  전용 주차석에 주차한 사람에게 누군가 “장애인이 운전한다”라고 읊조린다면? 가족이라는 명목 아래 학대를 받다가 참지 못하고 부모를 쥐어박은 사람에게 누군가 “패륜아 새끼”라고 읊조린 다면?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상황인가 “창녀 같은 년! 장애인이 운전한다! 패륜아 새끼!”라고 외친 사람의 이성은 빛날정도로 명석하며 이치에 맞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수치심을 느끼고 흐느끼는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는 이 같이 명석한 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자를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X세대, Y세대, Z세대를 구분 가능하다며, 그 같은 지식을 가졌다며 교양 있는 척을 하는가? 교양을 쌓기 위해 이 같은 지식에 탐욕을 드러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더욱 천박해질 뿐이다. 교양은 그런 식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커피를 홀짝이며 형편없는 책을 읽는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 쉽게 판가름하고 무엇인가를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지식을 알게 되었다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습관적으로 규정된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는 시도, 모든 옳고 그름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 첫걸음 조차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현기증이 날정도로 어지러운 것임을 교양을 쌓으려는 자들은 알아야 한다. 구분 짓는 행위는 구분된 대상을 쉽게 비난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따위 짓을 하면서 세대갈등을 해소하겠다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X세대로 충분히 재밌었다. 배꼽을 드러내고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요란한 음악에 허우적 되는 그들의 몸짓은 충분히 재밌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온갖 권위적인 것들에 돌멩이를 던지던 그들의 반항정신은 재밌었다. 그들의 무브먼트를 상징하는 X세대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재밌었다. Y세대, Z세대는 규정되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이다 하지만 조만간이다. 지금까지는 X세대라 칭해지는 자들은 하나의 밈으로서 활용되며 우스운 유머를 생산해냈다. 하지만 X세대라는 하나의 틀이 Y세대, Z세대가 규정되면서 단단해졌다. 경직되어 간다. 거시기에 애정을 품으면 빳빳이 경직되듯 X세대에 애정이 쌓이고 소속감이 강해져 간다. X세대는 조금씩 권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세대갈등은 그렇게 증폭되어 갈 것이다. 사상은 거시기와 같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불만족을 주는 것들에게 솔직한 불만을 토해내자. 다만 나니깐, 나이기 때문에 그 같은 불만을 토해야 한다.  X세대로서, Y세대로서, Z세대로서 불만을 드러내지 말자. 흑인이기 때문에 백인을 아니꼽게 봐서는 안된다. 남자로서 여자의 나약함을 지적해서는 안된다. 소속감에 아늑함을 느낄 때 허벅지를 꼬집고 볼짝을 갈기며 정신 차리자. 교양 있는 사람의 강인함은 그렇게 형성될 것이다. 우리들은 눈을 내리깔며 쉽게 판단하고 정의하는 어리석은 권위감에 도취된 자를 꼰대라고 한다. 꼰대는 자기가 살아온 시대에, 자기가 가진 성별에, 자기가 속한 사회적 계급에 충분한 만족감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교양 없는 사람이라 일컫는다.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떠한 소속감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홀로 위대하며 홀로 대단하다. 내가 좋아하고 행하는 것이 곧 그 시대의 문화임을 당당히 표현하던 젊은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육체적 노쇠함이 그 같은 열정을 소화해내지 못한다는 점은 슬픈 일이지만 노련함으로 극복이 가능함을 수없이 많은 위인들이 증명해 냈다. 그 같은 노련함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을 하자. 코엔 형제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노인인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의미 없이 쏟아내는 대사들을 통해 침묵한 자의 듬직함을 잘 보여준다. 불만을 토해낼 힘이 없다면 차라리 듬직함이라도 갖춰보자.

 나는 본인으로서 무엇인가에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의 초롱한 눈망울을 볼 때 건강함을 느낀다. 반면에 무엇인가에 소속되어 앵무새 같은 의견을 지저귀는 이를 볼 때면 역겨움을 느낀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가 낭만적인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주인공이 여러 시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신이 속한 시대를 비난하며 탈출하려는 건강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낭만적으로 살아보자. X, Y, Z를 구분 짓는 것부터 그만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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