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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Nov 07. 2021

아나키스트 활동 그룹 선언 2

목적? 에휴.... 시발 나랑 같이 좀 놀자

나는 앞서 회비를 걷자는 의견을 담은 글을 썼다. 그 글에는 회비를 걷기로 한 이유, 예상되는 거부감에 대한 절감 그리고 회비를 사용하는 방법이 적혀있다. 맞다 회비를 걷는 목적 따윈 적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확실한 목적을 알고 싶다는 이들이 생겼다. 아니 사실 그래서일 리가 없다. 그들이 목적을 묻는 이유에는 진정 그 목적을 궁금해서가 아니니 말이다. 어떠한 일이 진행될 때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행위는 "나는 불안해" 따위의 나약한 심성을 간신히 에둘러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불안함을 느끼는 것을 타박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생존 욕구를 억제하는 미친 새끼는 나의 역할이 아니다. 다만 왜 그 같은 불안을 단순히 불안으로 밖에... 즉 불안에 설렘을 동반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불안한 미래에 좇같은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사람을 모으고 싶지 않다. 목적은 다분히 말하지 않은 것이며 동시에 말할 수도 없었다.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실질적 힘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여러 정치적 사안에 뛰어들어 아나키스트의 목소리를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따위의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앞의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뒷목이 당겨오며 팔에 닭살이 돋아 힘이 빠진다. 당신은 실로 저 같은 말을 듣기를 원하며 저 같은 말에 안심을 하며 회비를 낼 수 있는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냔 말이다. 정말 좇같은 상황이다. 당신들은 내가 사기꾼이 되었으면 하는가?

목적이란 실로 진취적인 동시에 폭력적인 것이다.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 수많은 선생,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위해 알찬 하루를 보내라는 수많은 정신병자들 밑에 그 아래에서 나는 교육을 받아 왔다. 이 같은 더러운 교육을 받은 나에게 찌꺼기가 안 붙었을 리 없다. 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더 싸워야 하는 것일까? 목적을 말하라는 이 병신들을 보자니 나는 뒤질 때까지 싸워야 하나 보다.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악취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구체적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밟혀야 하는 존재들을 보며 슬퍼해 왔다. 혹여 당신은 목표가 달랐다면, 나아가는 방향이 저 방향이 아니었다면, 다른 목적의식을 바라봤다면 따위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안일하다는 것을 언제 깨달을 것인지 정말이지 궁금해진다. 목적은 정해지는 순간 배제될 것을 찾아 나서는 법이다. 그 배제되는 것들은 당연 복종을 강요받는다. 이 떨거지들아 머리를 수그리는 것이 뭐가 그리 자랑스러워 또 어딘가 머리를 조아려야 되는가 하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냐. 벼가 익으면 대가리를 수그리고 그것은 수확될 뿐이다. 빠르게 수확되어 누군가의 배속에 뒤져나가는 것 그것이 당신의 인생인가? 그걸로 만족하는가? 제발 대가리 좀 쳐들고 살아라 목적이라는 밝은 태양을 쬐며 익어가는 모습이 어찌 아나키스트의 모습일 수 있는가 이미 대가리가 무거워 수그릴 수밖에 없다면 바람이라도 느껴라 그 바람이 당신의 대가리를 치켜세워줄 것이다. 휘청거리며 불안스레 움직이더라도 어쨌든 한두 번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해 줄 것이며 멀리 떠나게 해 줄 것이다.

혹여 당신은 목적 하나를 정했을 때 생기는 '우리' 같은 즉 구심력을 원하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실로 목적 하나를 정했을 때 조직 내의 분위기는 활기를 띌 것이며 더욱 활동적일 수 있다. 허나 그 같이 생기는 구심력은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워질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풍기는 건강함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목적 아래 획일화된 구심력은 원심력을 죽일 뿐이다. 항상 벗어나고 일탈하고 튕겨져 나가는 것을 소망하며 분자화 되는 그 같은 에너지, 외로움에 허덕일지라도 분할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함. 바로 거기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건강함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 같은 당당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 건강함을 유지시켜주는 것인가? 나는 그답을 도망갈 수 있는 자의 여유라 하고 싶다.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자 혹은 언제라도 도망가는 것을 정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가진 자여야 그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생각한다. 허나 현재 우리는 정신적 도피만을 행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다면, 저렇게 된다면, 이럴 수만 있다면 등의 수많은 IF를 생산해내며 정신적 도피만을 행할 뿐이다. 이는 나의 허락도 없이 나를 국가에 소속시켜 나의 권리를 박탈시키는 권력의 힘에 내가 복종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처절하게 쓰자면 복종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는 순간 그것은 이미 도망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정신적으로 도망쳤다" 하며 자위하는 것일 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육체적으로 도망갈 수 있는 곳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장소가 현재 없기에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비참한 이유로 구심력을 애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말했듯 목적을 내세우는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럼 현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는 어떻게 구심력을 생성해 낼 수 있을까? 망나니 마냥 날뛰는 저 건강한 자들을 어떻게 가까이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다만 조금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의 손을 잡아야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와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나의 손을 거절하지 않길 바란다. 또한 겁내지 않았으면 한다. 저 투박한 손이 더럽지는 않을까 하며 미리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건강하다면 맞잡아본 나의 손이 더럽다면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신적 도피로 만족하기에는 나는 진작에 지쳤다. 같이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대끼며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보자! 당신과 부대끼며 생기는 갈등을 나는 즐길 준비가 되었다. 같이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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