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lmo Apr 08. 2024

경유지에서


2019년 1월 17일 우리는 스위스 인터라켄 근방의 어느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야에 가득 차 들어온 것은 설산이었다. 역사는 완전히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각 꼭대기들은 잘만 하면 하늘에도 닿을 것 같았고,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릴수록 침엽수 무리가 산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봄이나 여름 만개하던 활엽수의 축축한 생기와 비교하자면, 이곳 침엽수는 건조하게 죽은 체하며 살아 있었다. 그들 무리는 푸르다기보다 검다. 햇빛을 반사하는 하얀 눈과 대비를 이루어 그런지 나무는 먹색에 가까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침엽수 사이로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활엽수 몇 그루가 숨어 있었다. 눈과 바위, 가지만 남은 활엽수와 침엽수 들. 네 가지가 이 거대한 산맥의 전부다. 흙은 눈이 녹기 전까지 어둠 속에 은신한다. 


          역사 주변으로는 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와 함께 하차하는 승객 또한 없다시피 했는데, 이 점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우리는 내려야 할 곳에 제대로 내린 것이 맞는지 잠시 의심했다. 알프스의 융프라우 산괴에 위치한 인터라켄 지역은 스위스에 방문하는 많은 관광객이 머물다 가는 곳이다. 특히 겨울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기에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기도 하다. 아찔한 높이나 가파른 경사, 푸짐하게 쌓인 눈 따위의 것들은 산의 무기라기보다 인간의 장난감에 가까워진 지 오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곳은 의외로 황량했다. 다행히 우리는 엉뚱한 곳에 하차한 것이 아니었고, 숙소에도 순조롭게 도착했다. 알고 보니 다른 이들 대부분은 인터라켄에서도 그린델발트행 등산전차가 출발하는 곳과 인접한 숙소들을 이용하는 듯했다. 우리의 위치와는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이 곳은 인터라켄 역으로 향하는 승객들이 잠시 정차하고 지나치는 역이다. 눈에 띄는 상점이나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역 주변으로 이층이나 삼층 정도 되는 높이의 작은 건물들이 몇 채 있었지만, 그곳에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의 행적은 묘연해 보였다. 내가 올린 사진 속 건물들의 생김새는 대체로 단조롭다. 사진에서 좌측의 회색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는 세 대의 승용차가 보인다. 그보다 조금 더 떨어진, 아스팔트 도로와 면한 곳에는 주차 정산기가 설치돼 있다. 다만 주행 중인 차나 행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차된 차들과 정산기 사이 가운데 위치한 네 개의 의류수거함이 투박하게 서 있을 뿐이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수거함 전면을 감싼 빨간 포스터에 "TEXAID"라는 사명이 큼직하게 쓰여 있다. 그 상단에는 "Kleider & Schuhe"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이는 독일어로 옷과 신발을 뜻한다. 스위스는 4개 언어(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독일어는 그 중 사용 비율의 절반이 넘게 쓰이는 언어다. 우측에는 기물의 모양과 포스터의 색이 다른 또 하나의 수거함이 있다. 아마도 다른 회사의 것으로 생각된다. 하얀 박스에 발라진 초록색 포스터에 굵은 글씨로 "sammlung"이라 쓰여있다. 수집, 모으기를 의미하는 독일어다. 


          네 개의 의류수거함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곳 경유지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주차된 차와 건물 그리고 눈이 치워진 도로가 암시하는 것과 같은 신호다. 사진에는 적막이 흐르고, 다만 단서만이 무언가를 말한다. 누군가 잠시 정차하고 지나치는 이곳에 정착해 있는 사람과 사물 들. 도착한 기차와 떠나는 기차를 익숙한 듯 지켜보는 존재들은, 우두커니 서서 죽은 체하며 이곳에 살아 있다. 다만 고립되지 않은 채 다른 곳과 연결된다. 의류 수거함에 수집된 옷과 신발은 이곳 사람들의 흔적을 싣고 어디론가 떠난다. 주차된 차는 눈이 치워진 도로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건너간다. 식료품 상점에는 타 지역에서 들여온 술과 음료가 유통된다. 이곳 지사에서 일하도록 발령 받은 누군가가 이사를 오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성인이 된 자식을 떠나보낸다. 얼마간 조용히 이루어지는 이 순환들은 여느 땅과 다를 바 없이 분주하다. 사진에서 느낀 적막은 정적과 구분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