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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리 Oct 30. 2024

앙상한 이의 일일: 직장 편

“안녕하세요. “

  평범한 날인 것처럼,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동료들과 출근 인사를 나눈다. 아침 내내 지하철에서 입안을 맴도는 시큼함과 속 시끄러운 생각으로 기분이 퍽 사나운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게끔.

  자리로 와서 컴퓨터 전원만 얼른 켠 채 곧장 탕비실로 달려간다. 전날 씻어둔 컵을 허겁지겁 집어 들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4:6 비율로 가득 채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우선 한 모금 크게 들이켠다. 따뜻한 물 한 모금에 신물과 함께 내둥 전전긍긍했던 마음까지 잠시나마 씻기는 기분이다. 괜히 차분한 발걸음으로 자리로 가 앉는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온전히 출근한다.


  상대적으로 속이 비어있는 오전 시간엔 식도염의 존재감이 크지 않다. 입이 텁텁해질 즈음 물을 조금 머금어주면 위산이 금방 희석되어 불편한 감각이 더뎌진다. 아침이라 목이 잠겨 전화를 받을 땐 목이 이따금씩 갈라지지만 ‘큼큼’ 두어 번이면 그럭저럭 괜찮아진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금세 허기가 진다. 나와 같은 병을 앓는 누군가는 먹지 못하는 만큼 식욕도 떨어진다는데, 나는 아프기 전과 비교해 식욕이 전혀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비극적이다. 아니, 오히려 다행인 건가? 허기 앞에선 슴슴한 미음마저도 먹음직스러우니 말이다. 자극을 덜어낸 식사를 해야 하는 나에겐 그 편이 더 낫겠다. 그래, 차라리 다행인 것으로 하자.


  점심시간이 되고, 그날그날 동료들과 함께 정한 메뉴에 따라 식사를 한다. 오늘은 가볍게 먹고 싶어서 샐러드를 골랐다. 굳이 굳이 드레싱을 추가해 풀 맛보다는 소스맛으로 풍성한 샐러드를 먹는다. 샐러드드레싱은 죄책감 없이 식사에 추가할 수 있는 유일한 자극이다. 어느 한 잎 소홀하지 않게 샐러드를 열심히 버무려 준 뒤 식사를 시작한다. 고작 샐러드여도 쉽게 탈이날 수 있으므로 정말 오랫동안 꼭꼭 씹은 후 삼켜야 한다. 아프기 전 대강 씹고 덩어리째 삼켜 버리던 습관이 불쑥 튀어나올까 봐, 머릿속으로는 내가 음식을 충분히 부순 후 삼키고 있는 지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그래서 나의 점심 식사는 한갓지지만 분주하고, 느리지만 급하다. 오늘은 그래도 사분지 삼은 먹었다. 증상이 심할 땐 반도 못 먹었었는데, 발전한 내 위장이 기특하다.


  식사 후 양치질은 곧장 하는 편이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위산이 역류하여 목 안에 불편한 감각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의 양치질 중에도 거울에 비친 나의 앙상함을 뜯어보는 일은 느슨히 하지 않는다. 거울 보랴, 칫솔질하랴, 5분을 정말 알뜰하게 보낸 뒤엔 친한 동료들과 수다 떠는 시간을 갖는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목적 없는, 의식의 흐름대로의 대화는 직장 생활에서 몇 안 되는 재밋거리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로지 웃음만이 가득 차있는 시간에 흠뻑 빠지지만, 나는 온전히 즐겁지 못하다. 내 의식의 일부는 늘 내가 느끼는 증상을 감지하는 데에 할당되어 있으므로. 팔 할 즈음은 동료들과의 대화에, 이 할 즈음은 점심이 잘 소화되고 있는지, 위산은 얼마큼 올라오는지, 속이 쓰리진 않는지 등을 체크하는데 집중한다. 행복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나의 이 할을 빼앗아 가는 내 병이 새삼 야속하다.


  일과 중 가장 길게 느껴지는, 물리적으로 가장 길기도 한 오후 업무 시간. 내가 가장 치열하게 역류병과 싸우는 시간이다. 식사 후 두어 시간이 경과한 후부터 위산 역류가 상당히 활발해진다. 이겨내 보고자 틈틈이 물을 마셔도 되려 그것과 함께 위산이 역류하여 입 안을 귀찮게 한다. 후두까지 올라올 땐 가래와 기침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위식도 역류질환‘이라는 것은 죽을 만큼의 고통을 주는 병도, 일상생활을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는 병도 아니다(물론 증상이 심한 이는 그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고도 한다). 살이 빠지는 것 외엔 외양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앙상하게 만들고, 성가시고, 귀찮고, 걸리적거릴 뿐이다. 오히려 그런 점이 이 병의 환자들을 더욱 언짢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삶의 질은 계속 추락하고 있는데,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나의 투병은 애매하다. 혼자서만 치열하게 아프고 혼자서만 조용하게 울적하다.


  그렇게 나의 오후는 겉으로는 고요히, 내적으로는 맹렬히 지나간다. 신경 쓰이는 증상을 한 켠에 두고 바쁜 업무들을 하나씩 해치워 나가지만, 업무 사이사이 여유가 생길 때마다 증상은 의식 위로  금세 떠오른다. 선명하게 떠오른 의식 속의 증상을 치워버리기도 전에 바쁜 업무가 몰아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신물과 이물감과 속 쓰림과 함께 업무를 처리해 나간다. 매일 이런 식으로 바빴다가, 짜증 났다가, 우울했다가, 원망스러웠다가, 틈틈이 고요해진다. 짧은 단위의 격한 감정들에 적응이 될 때쯤 오후 일과가 마무리된다.


  퇴근을 한 시간 정도 남겨두고 컵을 씻는다. 오후 5시를 기준으로 10분 전, 또는 10분 후를 넘어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재발 이후부터는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다 보니 식사를 제외한 일상 루틴들도 자연스럽게 일률적이다. 그 이면에는, 질서에 맞게 살면 제멋대로인 위장의 움직임도 제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가 내재되어 있다.


  컵을 씻고 자리로 돌아와 남은 업무를 마무리 한 뒤 퇴근길에 나선다. 출근길의 발걸음이 초조함의 분주였다면, 퇴근길의 발걸음은 일터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의 분주이다. 출근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는 퇴근길을 지나,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퇴근이라는 보편적인 행복 앞에서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면 퇴근 후 감자칩을 먹으며 맥주 한 잔 했을 텐데‘와 같은 생각을 하며 굳이 그것을 깎아 먹는다. 이 세상 모든 즐거움, 그리움, 슬픔, 행복을 식도염과 결부하는 것은 나의 또 다른 만성질환인 듯하다. 그렇게 나는 우울한 듯 온화하게, 앙상하지만 멀쩡하게, 아프면서 건강하게 하루를 또 살아낸다.

앙상한 이의 일일은, 생각보다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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