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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자 Mar 31. 2024

당신에게 쓰는 편지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가닿을지 모를 편지를 쓰려니 첫 문장부터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오늘은 경칩 다음 날입니다. 요 며칠, 미세먼지가 심했는데 오늘은 공기가 꽤 좋아요.

하늘이 회색빛이긴 하지만요.


3월인데, 새해에 다짐했던 혹은 생각했던? 마음들은 잘 이어가고 계신가요?

저는 몇 달 전과 비교하자면,, 꽤 편안해졌습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했던 일들도 이제야 조금씩 해보고 있어요.


저는 글 쓰는 일을 했고 지금도 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홈프로텍터.


작년 연말, 몇 년 동안 준비한 작품을 제 손으로 놓았어요. 사실 놓는데 까지 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회사가 정말 나쁘지만 여기서 참으면... 그래도 데뷔시켜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주변에서도 같은 말을 하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놓은 이유는.. 어찌어찌 된다고 해도 제 상처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어요.  작품을 쓰는 몇 년 동안, 칭찬 한 번 받지 못하고 욕만 먹었어요. 회사가 먼저 제 작품을 보고 계약하자고 한 작품인데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놓고 나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요. 몇 년 동안 그 한 작품에 매달렸으니 써놓은 작품이 없기도 하고 몇 년 간 자존감은 그것대로 낮아져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연말, 연초를 보내다가 방구석에서 피폐해져 가는 스스로도 꼴 보기 싫어서 미뤄놓은 것들에 하나씩 강제로 밀어 넣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 미쳐 있는 것은 클라이밍입니다.

전부터 클라이밍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계속 미뤄왔었거든요. 일일강습을 당장 다음날 신청해서 강제로 몸이 가게 만들었고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이후엔 유튜브로 공부하고 클라이밍장가서 실험해보고 하며 2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3월부턴 강습받고 있어요. 오늘 저녁엔 4번째 강습이 있는 날입니다.


운동하면서 몸이 활기를 찾아서 그런가 못할 것 같은 새 작품 작업도 돌입했어요. 클라이밍에 미쳐서 아주 큰 시간을 들이고 있진 않지만 (원랜 책상에 앉는 것조차 꺼려했어요)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참 인생이 그래요. 저는 항상 남들에 비해 이룬 것이 없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 글도 원래 전공하던 일에서 자꾸 밀리다 보니 돌아서라도 그곳에 가고 싶단 생각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쓰게 된 거라 난 항상 남들보다 늦는구나. 못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했어요. 그 생각이 저를 계속 좀 먹었고요.


클라이밍에 재미를 느끼는 걸 생각해 보니 항상 경쟁구도에서 밀리는 제 자신을 보는 게 힘들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는데 이 운동은 저와의 싸움이니까 이번에 져도 내일 다시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물론... 저는 심각한 내향형 인간이라.. 가끔 모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지면... 그리고 저에게 갑자기 응원을 보내면... 당황해서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모르는 당신의 요즘도 궁금하네요.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을지 아니면 아직 준비 중이 신건지. 준비를 해도 하지 않았어도 뭐든 괜찮을 겁니다.

몇 년 동안 피폐하게 지낸 저도 이제야 깨어났듯이 시간이 걸릴 뿐, 누구에게나 봄이 오더라고요.


ps. 신기하게 편지를 다 적으니 회색빛 하늘에 조금 파란빛이 돌기 시작해요!



가끔 내 마음과 상황을 속속히 아는 사람보다 알지 못하는 이의 위로와 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르는 이에게 편지를 쓰곤 합니다.

남들에게 하지 못한 말을 하기 위해서 모르는 이를 만들기도 하고요.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이가 생각나네요.

미정이의 모르는 이에게 보내는 말도 결국 누군가에게 가닿았죠.  


이 편지는 경칩 다음 날, 실체 없는 모르는 당신에게 써본 편지 입니다.

지금은 춘분도 지나고 4월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미정이를 생각하며 뒤늦게 늦은 편지를 올려봅니다. 저도 결국엔 어딘가에 가닿겠죠. 미정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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