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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Dec 20. 2021

오늘의 영광이 된 100년 전의 외면

순천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조선 후기 읍성의 모습이 잘 보존된 곳이다. 성곽뿐 아니라 관공서와 민가까지 함께 보존된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곳은 모두 남아 있어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낙안읍성은 건축 답사 코스로 좋은 곳만은 아니다. 넓은 들판과 낮은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과 읍성 안팎의 여유로운 경관으로 산책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자주 봤다고  안다고 착각할 일이 아닌  같다. 나는 낙안읍성에 여러  다녀왔지만,  가치를 제대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시절 학보사 엠티로 왔을 때에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낯설기만 했다. 성곽 상면 (성상로) 걸으며 촌스런 흰색 단체티를 입고 찍은 사진이 생각난다.


그때는 초가집들만이 군데군데 몰려 있었고, 바람에 흙먼지가 뿌옇게 날린 기억뿐이다.(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던 듯하다.) 10여 년쯤 전일까, 아버님 살아 계실 때 모시고 읍성 주막에서 약주를 대접해 드린 기억이다. 그때가 귀한 답사였구나 싶다. 세 번째는 7년 전 한옥 목수로 일하러 와서였다. 역시 일하느라 바빴지 읍성 내부를 자세히 돌아보지는 못한 채, 인상적인 장면 사진만 몇 컷 찍은 것 같다.


오히려 이곳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 후 문화재와 전통건축을 도면과 논문, 책으로 공부하고 나서였다. 낙안 객사의 구조가 특징적이고, 감옥시설이 복원되어 있으며, 읍성 내 여러 시설의 배치가 어떤지 등은 그때서야 알게 됐다. 결국, 내부 시설을 자세히 돌아보게 된 것은 장흥에 귀촌한 후인 2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자주 봤다고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가깝다고 더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세상 일에 겸손할 일이다.  


읍성 내부


낙안읍성 내외부 (2019. 10. 순천)


낙안읍성은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뒤로 큰 산이 받치는 지형에 위치했다. 북쪽과 좌우를 산 능선이 감싸고 앞은 논밭이 펼쳐진다. 앞으로 더 나가면 순천만과 여수, 고흥이 접한 바다로 연결된다. 즉, 낙안읍성은 곡창지대와 해산물 풍부한 갯벌을 앞에 두고 산 아래에 있다.


읍성의 생김새는 가로로 긴 사각 모양이자 모서리가 둥근 타원형이다. 전국의 읍성이 대체로 이와 비슷한 형태다. 따라서 읍성 내부 대지도 동서로 장방형이 일반적인데, 각각 방위별 성문을 설치했다. 주요 출입문이 남문이 되는 경우가 많고, 북문은 대개 산에 막혀 있으므로 생략하거나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성문은 출입문 별로 특징이 있었는데, 흔히 동문은 관리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서문은 일반 백성들의 사용이 잦았다. 이 경우 서문 밖에 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한양도성은 좀 달랐는데 영호남의 물류와 상인들이 흥인지문(동대문)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은 조선 초기 토성으로 축성됐고, 1626년 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개축했다. 전국 대부분의 읍성이 이와 비슷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지방 읍성들은 대개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고 지방경제가 부흥하던 때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친 것 들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훼손됐다가 지난 30-40년 사이 다시 개보수되어 지금 모습을 갖췄다.


읍성의 내부 도로는 크게 세 갈래 길이 연결된 구조다. 주요 출입문인 남문에서 진입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이 동서 대문을 가로로 연결하는 좌우 대로에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T'자형 메인 도로가 형성된다. 낙안읍성도 이와 같은 도로 형태를 갖췄다.


낙안읍성 내부에는 메인도로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서대로 중앙부 위쪽에 관공서들이 자리하고, 하부 남문에서 가까운 곳에 민가가 형성되어 있다. 전국의 다른 읍성들도 모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성곽의 구성



성벽과 그 위에 있는 여장, 전투시설들 (2019. 10. 순천)


성곽은 기본적으로 전투를 위한 시절이다. 읍성의 위상과 규모, 전략적 중요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읍성은 전투 관련 기능이 촘촘하게 설정되어 있다.


성문은 전투 시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니 특별한 대비가 필요하다. 성벽을 쌓더라도 성문 주위는 더 크고 견고한 돌로 튼튼히 쌓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낙안읍성 성문 앞에는 또 한 겹의 성벽이 한 팔로 끌어 안듯이 반원형으로 쌓아져 있다. 옹성이다.


다른 형태도 있는데 수원화성 팔달문의 옹성은 두 팔로 보듬은 것처럼 둥근 모양이다. 이렇듯 옹성은 여러 가지 유형 있다. 그러나 생김이 어떻든 옹성은 성문에 근접한 적군을 에워싸고 성벽 위에서 공격해 격퇴하기 위한 시설이다.


낙안읍성 성벽과 옹성은 규격이 큰 자연석으로 쌓았다. 돌이 생긴대로 서로 밀착해서 쌓고 경우에 따라 약간씩 다듬어 빈틈없이 맞춘다. 사이사이 작은 끼움 돌을 끼워 견고성을 확보했다.  


성벽 상부에는 네모지고 작은 돌 들을 따로 골라 쌓은 낮은 담장이 있다. 여장이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병사들이 몸을 가려가며 총이나 활로 전투를 벌이는 시설이다. 여장은 일정한 간격으로 사이를 띄워 적의 동태를 살필 공간을 뒀고, 하나의 담장마다 두세 개씩의 총구멍도 내놨다. 사각 창문처럼 만든 구멍은 밑이 평평한 원총안과 밑이 밖으로 경사지게 만든 근총안으로 나뉜다. 원총안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할 때 사용하고, 근총안은 성벽 밑까지 온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낙안 읍성은 성벽 위로 난 산책로가 일품이다. 이곳을 걸으며 성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데 성 안팎의 경치를 모두 즐길 수 있어서 탐방객들의 필수 코스다. 성위에 난 길이라 해서 성상로라 부른다. 성상로 바닥은 성 안쪽으로 경사를 둬서 빗물이 성벽 밖으로 흐리지 않게 했다. 성벽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일반적인 조처다.


관공서들


낙안읍성 객사 (2019. 10. 순천)


낙안읍성 동서대로 위 중앙부에는 오른쪽에 객사와 왼쪽에 동헌이 있다. 이 두 건물은 읍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동헌은 고을 수령의 거주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객사는 왠지 낯선 건물이다.


그러나 유교국가인 조선사회 위계로는 정치적 상징성 면에서 객사 건물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했는데, 당시의 지방 고급 호텔쯤으로 볼 수 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나 출장 중인 행정관들이 객사의 좌우 방에서 머물렀다. 보통은 좌우 방에도 위계를 정해서 동쪽 방인 동익헌에 고급 관료가, 서익헌은 하급관료가 사용했다.  


그런데 호텔이 무슨 대수냐 싶지만, 객사는 단지 숙소만은 아니었다. 건물 중앙에 임금의 궐패를 안치하고 지방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인 예를 올렸던 장소다. 임금의 교지를 받는 곳도 여기였다. 즉, 객사는 임금의 중앙통치권력이 지방에 관철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소로서 관청의 핵심 시설이었다.


그러므로 객사 건물의 한 중앙은 좌우 온돌방보다 더 위상이 높다. 이를 반영해 지붕을 좌우보다 높이거나, 중앙 칸 앞에 월대라는 별도의 단을 내밀어 쌓아 격식을 갖췄다. 낙안읍성 객사도 중앙 세 칸의 지붕을 좌우보다 더 높이고 강조한 모습이다. 객사는 조선 초기 전국 360개 군현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방관을 파견할 때 의무적으로 설치한 건물이다.   


낙안읍성 옥사 (2019. 10. 순천)


동헌은 지방수령의 집무 공간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외아와 사생활 관사인 내아로 구성된다. 낙안읍성에도 동헌의 각 시설이 복원되어 있다. 동헌 주위로는 이방을 비롯한 행정 서리들의 근무처와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낙안 읍성에는 관아 부속시설로 옥사도 복원되어 있다. 죄수 격리수용시설로 여름 옥사와 겨울 옥사로 설계되어 있다.  


그밖에도 읍성과 그 주위에는 교육 시설과 각종 제례 시설들이 있다. 지방 공립 교육기관인 향교는 대개 읍성 밖 오리(2km) 내외의 경관 좋은 위치에 만들었다. 제례 시설로는 사직단과 성황단, 여단 등이 있었는데 읍성마다 그 위치는 차이가 있었다.


민가들
낙안읍성 민가들 (2019. 10. 순천)


낙안읍성 내부 남쪽 지역에는 옛 민가 수십 채가 마을을 형성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들을 포함해 모두 초가집 형태이며,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집도 많다.

평면 구성은 3칸짜리 'ㅡ'자 집으로, 부엌과 방이 연접한  간략한 구조다. 전라도 남해안 민가의 전통적인 구조다. 조금 큰 경우는 중간에 마루방을 포함해 방 세 칸에 부엌한칸을 부가해 4칸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평면이 작은 구조에서는 가족이 늘면 별도의 작은 채를 마당 한편에 지어서 공간 부족 문제을 해결했다.


마당의 대문 입구에는 따로 측간(화장실)을 두고 퇴비를 만드는 공간과 가축을 기르는 외양간을 함께 두기도 했다. 마당 한편에 있던 장독대와 채소밭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집이 있다.  낙안읍성 내 민속마을에는 40년 여 년 전까지도 전국 시골마을에 흔했던 조선 후기식 민가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집과 집 사이 골목길과 돌담도 원래의 형태대로 유지되고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2년 전 답사 때는 초가지붕 보수를 위해 볏짚을 손질해 이엉을 엮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초가지붕은 1-2년에 한 번씩 새 볏짚으로 보수해야 한다.

 


오늘의 영광이 된 100년 전의 외면


낙안읍성 민가 (2019. 10. 순천)


낙안읍성은 인기 있는 관광코스다. 내외국인 모두 찾는 사람들이 많고, 전통 민가에서 민박을 즐기는 수요도 높다. 이런 인기의 비결은 읍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잘 보존된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낙안읍성을 포함해 훼손을 면하고 살아남은 읍성들이 누리는 인기는 자세히 보면 역설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는 자원수탈과 전쟁준비를 위해 대대적으로 철로를 개설하고 전국 지방도시와 도로를 재정비했다. 이때 수많은 지방 읍성이 훼철되고 신시가지와 일본 상인들의 상권이 새로 조성됐다.


그런데 그 시기에 지방 옛 읍성 중에는 새로 놓인 철길이 비켜가고, 그 철길을 따라 새로운 중심지가 만들어지면서 기존 읍성은 공동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읍성들은 해방 후 산업화 시기에도 개발에서 소외됨에 따라 옛 모습 그대로 정체됐던 것이다.


그 대표 사례가 바로 낙안읍성이다. 철길이 낙안을 비켜가면서 인근 벌교에 철도역이 생긴 것이다. 그 후 벌교가 신도심으로 발전하면서 낙안은 중심 행정지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박제된 도시처럼 공동화됐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흘러 옛날의 정체 덕분에 낙안은 이제 새로운 관광명소가 됐다. 100년 전의 외면과 소외가 오늘의 영광이 된 셈이다.


관광자원으로서 낙안읍성의 가치는 앞으로 더 빛 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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