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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램프 Jul 05. 2023

나는 힘들 때, 수능특강 영어문제집을 푼다.   

(feat. 집중의 힘)

어느 일요일 오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거실에서 늘어놓고 푸지게 읽다가 갑자기 책을 보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20년 이상 내가 하던 일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시 멈춤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하루에 4~5시간 밖에 잠을 자본적이 없었고, 나의 식사를 제때 챙겨서 먹는다는 것은 (내가 부지런하지 않은 이상 누가 챙겨주는 것이 아니기에) 쉽지 않아 나는 항상 몸이 아팠다. 매일 새벽에 눈을 뜨면 코피를 쏟고 하루를 시작하기에, 매일 코피를 흘리는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도 이제는 덤덤해져 있었다. 결국 몸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라 여겨 지금껏 별 불만 없이 한걸음 한걸음 나의 속도가 아닌 세상의 속도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커리어는 단절되었고, 지금까지 삶과는 180도 다른 자유시간이 나에게 갑자기 주어져버렸다. 처음에는 이 잉여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고, 실은 주어진 자유시간에 마음이 살짝 설레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일을 쉬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노는 방법조차 잘 모르는 '시간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놀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많은 시간이 주어지면,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르고 솔직히 불안감이 먼저 엄습해 온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갑자기 하루가 너무너무 길어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뭘 시작해야 할지, 도대체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는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아... 백수도 해본 사람이 잘하겠구나!"


놀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놀려고 하면, 그 방법조차 몰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집안을 서성이게 된다. 뭐라도 내가 할 게 없나 두리번거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사실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가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어야 시작이라도 할 텐데, 이건 번아웃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평생을 일에 목숨 바쳐 최선을 다한 나로서는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가면역불균형으로 대학병원을 다니던 시절이 있던 나는 '목숨 바쳐'라는 표현을 꼭 쓰고 싶다.) 차라리 이럴 때 멍 때리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나는 그냥 시간을 마주하며 나의 불안감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안감이 나를 쳐다보는 시간들을 세다 보니, 무언가라도 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아니더라도, 잠시 잠깐이라도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제 버릇 개 못 준다'라고 했던가. 나는 나에게 가장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YES24 인터넷 서점을 로그인한 후, 매년 내가 사는 '수능특강 영어영역'문제집을 결제했다. 나는 영어강사이기 때문에 매년 수능특강 문제집을 구매해서, 시간이 나면 책을 읽어보며 영어시험의 흐름을 잡았다. 20년째 습관적으로 보는 책이기에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올해는 살짝 정신줄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 책을 구매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하지만 책꽂이에 일렬로 놓여있는 여러 연도별의 수능특강 문제집을 보면서, 이거라도 내가 손수 풀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영어를 가르치다 보니, 그리고 영어책을 집필하다 보니 하루에도 토 나올 정도로 수많은 영어지문에 둘러싸여서 살았던 내가, 그동안 잠시 내 일에 손을 놓고서 영어지문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영어를 매일 읽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영어원서로 되어 있는 책도 매일 읽고 있었지만, '문제집'과 '영어원서'는 기본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 영어원서는 지문의 기본 흐름을 보면서, 모르는 표현과 단어들을 정리하고, 좋은 구문이 나오면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다. 새로 나오는 신간을 구매하는 것은, 남보다 먼저 그 책을 읽고 있다는 유희를 느끼면서, 내가 원서를 읽을 시간을 얻었구나라는 자기만족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수능특강'을 집어들 때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내가 직접 문제를 풀어보면서 올해 수능문제 난이도와 지문의 소재 및 내용, 그리고 여러 유형별 문제풀이의 감을 유지하며, 실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집중을 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내가 초집중을 하는 순간이기에 문제집을 푸는 순간을 좋아했던 것이다. 백수가 되니 이제는 별별 짓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매일 내가 하던 일들이 나의 습관으로 자리매김을 해서 이제는 손을 놓을 수도 없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떠나지 않는다.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이 없다면, 왠지 나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에, 매일매일 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수능특강 문제집을 놓을 수가 없다. 오늘도 나는 수능특강 문제집을 풀며, 한 순간 집중하는 몰입의 힘으로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해설지는 자신만의 '오답노트'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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