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아직 남들은 해외여행을 가지 않을 때, 훌쩍 배낭을 메고 유럽을 두 달간 여행하고 돌아왔었다. 아직 일이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한 고비 넘기고 비수기에 들어가는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친 척하고 먼저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내 생전 처음으로 인천공항 출국장이 그렇게 텅텅 빈 것은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 구경을 신나게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여행하는 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차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작년까지 나는 그렇게 많이 불안하지 않았었다. 원래 처음부터 1년은 나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안식년이라고 생각했고, 이 분야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몸도 많이 상해있었기 때문에 내 몸을 먼저 추스르고 싶었다. 나를 잘 먹이고, 잘 씻기고, 그리고 잘 재워주고 싶었다. 실은 불면증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잠은 너무나 소중했고, 어쩌다 한 번씩 곤하게 자는 잠으로는 나의 피곤함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내가 나를 보살피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여행을 갔다 오고 난 뒤로도 난 그렇게 불안하지 않게 하루하루 나만의 루틴과 방식으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캠핑장 근처 시골마을...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 1년이 되는 시점이 지나가자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리되지 않았고, (나는 정리를 하고 싶은데, 회사는 정리해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관리자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인지, 자신이 정말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서인지 꾸준히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계약서 운운하면서 협박성, 회유성 발언들과 함께 날 괴롭혔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숨은 턱 하니 막히는데 이제 1년이 넘어가니 수중의 쌈짓돈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경제적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이건 나가서 맥도널드 알바라도 해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실은 이것 말고도 갑자기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지난달에는 정말 잠깐 이 세상에서 잠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아주 잠깐 들기도 했지만, 나는 워낙 게으르고 겁이 많은 인간이라 도망가는 것조차 귀찮아 지금 이문제들을 다 껴안고 있다. 이 더운 여름에...
그러던 와중 잠시 바람을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간만에 짧은 여행이라도 갈 심산이었던 것 같다. 여기만 아니라면 되는 심정이었고 캠핑 제안은 내가 아니라 오빠가 먼저 했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 바로 내일 떠나자며 부산스럽게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캠핑마니아도 아닌 내가 오빠가 좋아하는 코코볼 조명도 챙기고, 아이스박스에 넣을 큰 물도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고 (얼음물은 필수!), 캠핑장에서 고기와 함께 먹을 채소를 미리 씻어 손질까지 하면서 세상 캠핑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미친 듯이 준비에 준비를 하며 캠핑 전날밤을 지새웠다.
설악동 캠핑장에 들어가는 초입! 비 온 다음 날이라 눈이 부시게 하늘이 아름다웠다.
다음 날...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부자이지 않은가... 여유롭게 아침을 차려먹고, 이쁘게 꽃단장하고, 우리의 캠핑장을 향해서 느긋하게 출발하는 호기를 부렸다. 3년 전에 가본 적이 있던 캠핑장이기에 얼마나 좋은 풍경과 주변 시설들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기 전부터 마음은 설레었고, 아! 그래 백수도 이렇게 자체휴가를 한 번씩 떠나 줘야 하는 건데... 왜 작년에 배낭여행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잊고 지냈나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가는 도중에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우리는 '인제 합강정 휴게소'에 들러 비 내리는 멋진 풍경을 그냥 좋아라 바라보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우리 야영지에는 비가 내리면 안 되는데...라는 주문을 외면서. 떠나기 전에 일기예보를 보았을 때 지나가는 비라고 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비가 오는 걸 눈으로 지켜보니 캠핑장에서 만큼은 비가 오지 않아야 텐트를 칠 때 덜 힘들 텐데 하는 생각만 불쑥 떠올랐다.
인제 합강정 휴게소 (비가 많이 왔는데 사진을 찍으려니 비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워너비 '설악동 야영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물론 예상과는 달리 비가 더 내려 텐트를 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도착했다는 안도감으로 인해서인지, 먼 길 달려와서 힘든 몸이었지만 비를 맞으며 텐트를 치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실은 기분이 좋아졌다. 비 맞으며 텐트 치는 게 뭐가 좋냐고 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조금이라도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자 무기력한 내가 기력이 넘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아! 이래서 때로는 고생을 사서 할 필요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비 오는 밤에 텐트는 후딱 치고 (물론 타프가 오래 걸려서 진짜 후딱은 아니지만) 원래는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귀찮아 물회를 먹으로 차를 몰고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비록 밤새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바람이 몰아치고 아침에 우리의 타프는 반쪽이 날아가 있었지만, 정말 기분만큼은 아주 오래간만에 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쾌하고 좋았다.
만약 인생에 있어서 힘들고 지치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 방황하고 있다면, 짧게라도 캠핑을 다녀오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