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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램프 Aug 15. 2023

불안이 지나가고 난 후...



계속 글을 써야지 써야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이제야 겨우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그동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은 소용돌이 같은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앞으로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 고민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생의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라고 하는데, 일을 잠시 멈추고 1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나는 그 불안의 실체들과 하나씩 직면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몸이 많이 상해가면서 일을 했던 나였기에 처음 쉴 때는 정말 마음이 가벼웠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을 만끽했다. 내가 잠을 자고 싶은 만큼 자고(늘 나는 잠이 부족했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직접 해 먹고(집밥의 힘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동안 Yes24에 읽고 싶어서 쌓아만 두었던 책들도 하나씩 도장 깨기를 하듯 읽어나갔고(우리 오빠는 책 읽고 있는 나한테 "너는 책으로 변할 거야."라고 약 올린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드라마도 누군가 너무 좋다는 추천을 해주면 역주행으로 보고(나의 해방일지... 강추!), 운동 자체를 귀찮아하던 내가 매일 저녁 산책을 거의 거른 적이 없었고(보라매공원 맷돌체조는 나의 최애 운동이다), 거기다 이제는 '따릉이'까지 이용하면서 겁쟁이였던 내가 오빠 따라 서울시내를 쫄쫄 따라다닐 만큼 자전거 타기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너무나 놀라웠다.

정말 죽는 날까지 소처럼 죽어라 일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쇼핑과 외식으로 스트레스 풀고, 다시 다음 주 월요일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일하고, 이 무한 반복의 루프를 내가 걷어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돈을 나름 많이 벌었기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가 나한테는 정말 없었고,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차선책도 생각해보질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나에게 주어진 대로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 나가고 있었다. 이런 내가 일을 차버리고 백수의 일상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어떻게 보면 무료할 수도 있지만, 나 자신에게는 정말 충만한 하루하루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긍정적인 부분도 1년을 지나가는 시점이 되니 빛바랜 사진처럼 변하고, 나는 계속 피하기만 했었던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힘들게 일하다 너무 힘들어 그 일을 스톱하고 1년간 신나게 놀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니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서 이제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기간에 알바를 해서 치고 빠지는 게임 말고 지금 40대에 차근차근 준비해서 50대, 60대에도 은은하게 빛을 낼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아보고 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어제 나는 면접을 보고 왔고, 지금 당장의 수익은 크지 않지만 일을 한번 배워보고 나의 적성에 맞고 내가 잘해나갈 수 있는 자신이 생긴다면, 나이가 들어 내가 직접 운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여기에...

9월부터 번역도 슬슬해볼 생각이다. 10년 동안 영어교재를 만들었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영어교재와 영어번역은 또 다른 직업이고 내가 배울 부분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N잡의 시대'라고 하는데, 나도 하나씩 배워 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도 자신의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워낙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벌써부터 하고 싶은 일들을 나에게 열거하며 흥분하는 그를 바라볼 때, 오빠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이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30년이 넘은 소중한 친구와의 관계와 10년 동안 일을 하면서 이제는 직장 동료를 떠나 내가 할머니가 돼서도 만날 수 있는 좋은 분들과의 관계, 나의 보석 같은 동생들 그리고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우리 부부의 관계까지... 모든 인간관계 하나하나를 처음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던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서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당장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나의 '불안'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너무 불안했는데 그 불안의 실체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오히려 불안에서 나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신기했다! 나이만 먹고 아직 철딱서니 없었던 내가 이제야 겨우 나의 의지로 발을 한 걸음 내딛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글을 적어놓았지만 어쩌면 며칠 뒤에 나는 다시 두려움과 불안에 덜덜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완전한 내가 이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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