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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Jan 16. 2024

61. 내가 만난 100인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결혼 9년 차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의 피부가 닿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친근했고, 그렇다 할 표현이나 선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로에게 고마움이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도 서로의 직장에 누가 새로왔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만큼 많은 대화를 했으며, 일요일마다 교회에 갈 때면 차 안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더 해가곤 했다.


"오스트리아 하면 제일 먼저 뭐가 떠오르세요?"

투어가이드가 대뜸 모든 여행객에게 물었다.

"비엔나소시지?"

"음악?"


남편과 나는 차례로 대답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우리는 너무 달랐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 번도 큰소리로 싸운 적이 없는 우리는 프라하 길 한복판에서 대판 싸웠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남편은 시차가 없다. 지난 5년 전 유럽여행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해가 뜨면 돌아다니고, 해가 지면 자고, 때가 되면 먹었다.

반면에 나는 그나마 시차에 조금 둔한 편이지만 남편에 비하면 예민한 편이었다. 길을 걷다 허리가 아파오면 한국시간으로 밤 12였고, 새벽에 눈을 뜨면 한국시간 아침 9시였다.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이곳에서의 새벽독서와 글쓰기는 아주 할만했다. 이렇게 2-3시간의 고요함을 즐기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고 남편은 그때서야 일어났다. 교대하듯 우리 둘은 각자의 새벽을 즐겼다.


이번여행에서 나는 남편에게 한 가지 미션을 주었다. 남편은 길눈이 밝고, 지도를 잘 본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즘은 지도를 들고 여행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구글 지도를 사용한다. 남편에게 구글지도 미션을 주었다. I성향인 남편은 길을 찾는데 아주 신중했다. 그런데 통신상의 문제인지 구글은 잘못된 길을 안내해 주었고 문제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문제를 바로 잡았다. 알려준 방향대로 5분 넘게 열심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남편이 말한다.

"오. 이 길이 아닌데? 다시 반대방향으로 가라는데?"

"확실해?"


이런 일이 그것도 아주 자주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로 체력이 좋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 케리어까지 끌고 갈 때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여행스타일은 '행군하라'이며 나는 '머물러라.'였다. 아무 생각 없이 남편을 따라다녔다가는 금방 체력이 고갈되고 만다.


문제는 두 번째 숙소를 찾을 때 발생했다. 지진에는 아주 탁월하지만 케리어를 끄는데 아주 취약한 유럽 돌길을 행군하고 있을 때였다.

"또 이 길이 아니라는데?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가라는데?"

"또?"


예상대로 고갈된 체력소진과 시차로 인해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얼른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남편도 조금씩 지쳐가는지 더 이상 기계를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났고 이곳은 우리와 같은 관광객천지였다. 길을 물어보아도 그들또한 우리와 같은 처지였으며 무엇보다도 누가 관광객이고 누가 현지인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묻는 것도 지쳐버린 나를 뒤로 한채 남편은 번역기를 시도했다. 체코어로 번역해 낯선이들에게 다가갔다.

현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남편이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어떤 말을 길게 설명해주었다. 남편은 최근 나에게는 단 한 번도 지어준 적이 없는 보조개 띤 미소를 그녀에게 지으며 인사를 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굳은 표정에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차라리 우리는 서로 남인 게 나을지도 몰랐다.


"저쪽으로 돌아서 가라는데? 일단 저 쪽으로 가 보자."

큰 건물을 하나 끼고 코너를 돌아 나왔다. 왕복 트램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거리가 나왔다.

'또 여기서 어느 방향이란 말인가?'

더 복잡해진 사거리를 보니 허리는 더 끊어질 것 같았다. 현지 시각 6시, 유럽은 해가 빨리 떨어져 벌써 어둑어둑해졌고 한국시각으로는 자정을 훌쩍 넘기 시간이라고 내 몸이 계속 말해주고 있었다. 남편이 혼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가서 저기 저 사람에게 한 번 더 물어보면 안 될까?"

"아니, 왜 이 길이 맞다며?"

"맞긴 한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말이야."


'혹시나' 내가 남편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다음으로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 말을 들으니  남편 나를 너무 귀찮게 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번역기로 다시 한번 더 물어봐. 아까 내가 충분히 물어봤잖아!"

"그냥 네가 좀 물어보면 안 돼?"

둘이서 그렇게 미루는 사이에 우리의 타깃이었던 그 사람이 트램을 타고 가버렸고, 길 위에는 두 케리어와 우리 두 사람만이 남겨져있었다. 그제야 남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거 하나 물어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구글지도도 이제 여기가 맞다고 하고 아까 물어본 사람도 여기라고 했는데 뭐가 더 필요한데?"

남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꾹 참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이가 멀리서 개를 끌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저 사람에게 한 번만 좀 물어봐. 이 방향이 맞는지.."

"당신이 가서 물어봐. 나 허리 아프다고!"

"내가 어떻게 물어보냐고!"

"아까처럼 번역기 켜서 물어보면 되지!"

남편이 긴 한숨과 어금니를 한 번 더 꽉 깨물더니 말했다.


"내가 물어보는 건 하겠는데 대답을 못 알아듣겠다고. 특히 아까처럼 길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고!!"


"이런. 맙소사!"


생각지도 못했던 일처럼 남편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아직도 눈 먼 자.

이제야 눈 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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