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영 Jan 09. 2024

60. 내가 만난 100인

낯선 E, 낯선 I

평소 나는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것을 좋아하는 극도의 EEE 성향의 소유자이다.

오랜 시간을 여행하다 보면 내 몸에 맞게 터득된 노하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에서는 무조건 복도자리를 선호한다. 긴 노선의 비행은 주로 밤에 출발하기에 창문을 열 수도 없을뿐더러 수면을 취하기엔 창가는 조금 춥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복도자리는 옆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마다 옆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수고로움은 덜게 된다. 또 엉덩이가 아프면 언제든 일어나 구석진 곳으로 가 스트레칭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조심조심 움직이는 I의성향을 아주 사랑한다.  이번에도 창가 자리에 앉은 I를 위해 복도자리에 않은 E인 내가 자자리를 자주자주 비워준다. 그녀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움직인다. 나에게 방해가 될까 쉽게 말을 걸지 못하는 듯하다. 그렇게 16시간의 비행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눈치껏 돌아다녀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프라하로 가는 일정이다. 2시간의 짧은 경유시간인 데다 나는 이 나라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네덜란드는 히딩크의 나라, 풍차와 플란다스개가 있는 나라 이게 전부였다. 보딩패스를 들고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면세점을 통과하게 되었다. 상점들마다 네덜란드 특유의 풍차와 튤립이 그려진 마그네틱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잠시 들러 살까?'

순간 망설이다가 우리 게이트 쪽으로 가면 또 저런 상점이 있을지도 모르는 근거 없는 추측성 희망을 걸어보았다. 사실  비행기를 놓칠까 하는 우려가 가장 컸다. 하필이면 우리 게이트는 공항 맨 끝쪽에 자리해 있었으며 그곳에는 어떠한 상점 하나 없었다. 도착한 지 한참 후 보딩이 시작되었다. 보딩을 기다리는 동안 내 안에 E가 I를 탓하기 시작했다.


'튤립 마그네틱 진짜 예뻤는데 그냥 잠깐 들러 샀어야 했었어. 네덜란드는 언제 또 오겠어?'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만큼 크지 않고, 아주 소박했다. 짐도 금방 나왔다.

이번여행에는 특별히 환전을 하지 않고 '트래블로그'라는 카드를 만들었다. 필요할 때마다 바로 환전해 충전할 수 있고, 원하는 금액만큼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


'요즘 누가 여행 할 때 환전 한 돈뭉치를 들고 다니니? 이 카드 하나만 있으면 되지.'


세상 편리하고 세련된 MZ들의 카드를 정작 구시대적 실용주의자인 우리 꼰대가 만들었다는 이상스러운 세상에 나도 슬며시 발을 얹었다. 하지만 달랑 카드 한 장으로 입성한 낯선 나라의 기계는 나를 환대해주지 않았다. 영어를 사용하는 어느 곳에서든 소통의 어려움이 없었기에 나는 겁 없는 극도의 E로 덤벼들었다.

먼저 언어를 영어로 바꾸는 버튼을 누르고-비밀번호-현금-YES-YES-YES를 차례대로 눌러댔다. 비밀번호가 틀린다는 문구가 떴다. EEE 성향은 여기서 그저 E가 하나 사라질 뿐 절대 굴하지 않는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시도했다.

영어-비번-현금-YES-Yes-yes.

비밀번호가 또 틀렸다고 한다. 분명 제대로 눌렀다. 혹시 여행 가느라 설레어서 비밀번호를 평소와 다른 것으로 설정을 했는지 의심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참 알기가 어렵다. 특히 나 자신을 더더욱 모를 때가 많다. 그리고 비슷하게나마 신세대를 흉내 내긴 했지만 마음만은 걱정 가득 찬 구세대이다.

영어-비번-현금-YES-Yes-yes.

결국 3번의 비밀번호 오류로 카드가 완전히 잠겨버렸다. 나는 1초에 1.98원 한다는 국제전화로 600초를 소비한 뒤 비밀번호를 재설정 후 다시 기계 앞으로 나왔다.

영어-비번-현금-금액-YES-YES-YES.

무심한 기계는 자신을 이용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는 카드를 내뱉었다.


여기서 내 안에 모든 E들이 사라지고 I가 생겨난다. 옆에서 남편이 자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성화이지만 나는 어쩐지 사람보다 기계에 믿음이 간다.

'뭐가 문제일까? 좀 더 신중해져 보자.'

영어 누르고, 비번 누르고, 현금 누르고, 금액까지 누렀다 그리고 yes를 누르던 찰나 여기서 문제를 찾았다.

달러로 인출할 건지 묻는 문항에서 내가' YES'로 누른 게 문제였다. 나는 그저 환전된 체코화폐만 인출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여기에서'NO' 코루나(체코화폐)를 누른 뒤, 또 다른 화폐 환전을 원해?라는 마지막 질문에서 'No.'를 누른다.

현금이 나온다. 세상 어딜 가나 돈 나오는 소리는 기쁘고 반갑기만 하다.

극도로 안도하는 I가 된 나는 이제 기계보다 사람을 상대한다. 버스티켓 구매도 기계를 지나치고 줄을 서서 사람에게 직접 구매한다. 그리고 프라하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도시도, 버스에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그리고 긴장하는 내 모습까지도 모두 낯설다.


기계가 편한 E 성향인 자.

사람이 편한 I 성향인 자.


매거진의 이전글 27. 내가 만난 100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