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영 Dec 28. 2023

27. 내가 만난 100인

당신도 참 열심히 사는군요.

퇴근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지?'

'누가 내 차를 박았나?'

'차를 빼달라는 건가?'


의구심만 한가득 안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기영 고객님 되시죠? 저는 ○○○보험 상담사입니다."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는 오히려 나를 더 힘 빠지게 만들었다.

 불금, 해피프라이데이는커녕 번아웃 프라이데이를 맞고 있던  찰나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보험 상품을 설명했다. 나는 내심 정중히 거절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 그녀는 더 또박또박하게 상품설명을 이어갔다. 계속 듣다 보니 그녀에게서 마치 지금의 나를 보는 듯한 애틋한 연민이 들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이 훨씬 지났을 텐데...

 당신도 참 고생이 많네요. 혹시 오늘의 실적을 채우지 못해 이러고 있나요?  당신의 하루도 참 호락호락하지 않은것 같네요.'


"고객님 , 월 일만 원으로 추가 암보험 어떠세요?"


마침 그녀가 통화를 마무리하는 멘트를 날렸고 나에게도 정중히 거절할 기회가 왔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같은  그녀를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요,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혹시 내일 1시쯤 다시 전화주실수 있나요?"


나도 모르게 말을 던져놓고 보니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래도 대개 이런 상황이면  이렇게 답할 거라 기대했다.


"아~고객님 내일은 토요일이라서 안되고 혹시 주말 뒤 월요일에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하지만 이외의 답변이 들려왔다.

"넵! 고객님, 내일 1시에 전화드리겠습니다."

"네. 내일 전화 주세요."


안타깝게도 그녀는 내일이 토요일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내겐 실수를 바로잡을 기운도 없었다.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설마  내일이 주말인데 전화가 오겠어?. 이따 다시 문자나 전화가 오겠지?'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정확히 토요일 1시에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기영 고객님. 어제 전화드렸던.."

"오늘이 토요일인데도 일하세요?."

"아.. 네..고객님 혹시   제가 어제 설명드린 상품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아! 네. 가입은할 건데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날  난 그녀의 말대로 월 만원으로 든든한 암보험을 가입했다.


2년 후 ,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에  예쁘지 않은 모양의 결절이 보인다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추적검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제발 암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입한 보험을 뒤적거렸다.

 그때 그녀에게 가입한 상품에서 갑상선 암 진단비가 천만 원이나 지급된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다행히 갑상선결절은 그냥 물혹으로 판명되었다.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가지만 힘이  자.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가지만 힘이 자.



매거진의 이전글 26. 내가 만난 100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