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배낭여행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곳 브리즈번에서 한주를 보낸 뒤 시드니로 돌아가면 두 달간의 여정은 끝이 난다. 그제야 심적, 물적 여유가 조금 생겼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그동안 토스트나 시리얼 그리고 라면으로 버텼다. 하루 5달러 이상은 지출하지 않았다. 시작과 중간은 빈티가 풀풀 나는 여행이었지만, 마지막은 럭셔리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비가 생각보다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부터 맛있는 거 좀 먹자!"
브리즈번 중심가 마트에 들러 금방 나무에 따온 듯한 포도와 체리 그리고 가격이 좀 나가는 비스킷을 샀다.
사실 몇 주전 돌고래 투어 때 무료로 제공되는 쿠키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마트에 가 찾아보니 하나에 4.90달러나 했다. 나의 하루식비를 비스킷 하나에 몰빵 할 수 없기에 얼른 내려놓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동안의 철저한 근검절약으로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이런 호사를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와 가장 깨끗한 접시를 꺼내 과일과 비스킷을 예쁘게 담아 티와 함께 즐기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동안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여유로운 호주인이 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뼛속 깊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얼마 못 가 드러났다. 주방 한편에선 칙칙칙 고향의 소리를 내며 구수한 밥이 전기밥솥에서 익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이다! 누가 여기까지 한국 밥솥을 가져온 거야?'
그때 옆에서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밥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밥솥주인인가?'
'근데 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그가 라면이 다 익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면에 결레인 것 같아 얼른 입을 가리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지인으로 보이는 또 한 명의 남자에게 금방 들키고 말았다.
"형! 선글라스 좀 벗지 마요. 저 봐요. 사람들이 웃잖아요."
마치 판다와 같이 생긴 그가 다시 머리 위에 있던 선글라스를 내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낮에 선글라스 낀 채 해변에서 깜빡 잠들어서 그래요. "
그런데 그때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오셨어요?"
"어제 골드코스트에서 왔어요."
"혼자 여행하세요?"
"네."
"우와~ 여자 혼자서 여행을 한다고요? 줄리아! 여기 이분 혼자서 여행 중이래."
또 한 명의 일행인 듯 보이는 여자애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동그란 눈을 하고 다가왔다.
"혼자 여행을 다니신다고요?"
"아네. 거의 한 달 전에 와서 이제 여행막바지에 접어들었어요."
"그럼 호주 동부를 혼자서 여행하신 거네요?"
"네."
"진짜! 대단하다! 안 무서우세요?"
"생각보다 안전하던걸요. 그런데 저기 전기밥솥은 어디서 난 거예요?"
"아~ 저거요? 저희는 지난주에 부산에서 왔는데 거기서부터 가지고 온 거예요. 에드워드가 여행지에서 잘 먹어야 한다고 챙겨 왔어요."
"이렇게 총 다섯 명이서 같이 여행을 하시는 거예요?"
모두 다섯 명인 이들은 렌터카를 빌려, 전기밥솝을 싣고 다니며 매 끼니마다 밥을 해 먹으며 여행을 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나와 동갑내기여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때 마침 고슬고슬하게 잘 익은 흰밥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 켰다.
"같이 드실래요?"
"같이 드세요. 어차피 밥도 많고, 라면도 많아요."
지금 내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그녀가 하고 있고, 그 옆에 있던 이들도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느새 내 몸은 꼬들한 라면과 따뜻한 흰쌀밥 앞에 앉아있고, 그들은 나를 개의치 않고 라면을 뜨면서 말했다.
"야~! 오늘 밥 누가 했니? 잭이 했나? 밥 진짜 잘 됐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만의 특이했던 점이 하나씩 발견되었다. 모두 이름만 영어일 뿐이었다. 나머지 대화들은 한국말을 사용했다.
"근데 보통 배낭여행을 하면 살이 빠진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살이 찌지?"
"그건 우리가 너무 잘 먹고 다니니까 그렇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가운데 갑자기 건물 안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누구나 할 것 없이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갔다. 5층인 식당에서 내려다보니 1층 남자숙소에서 두 명의 외국인이 깨어진 창문밖으로 배낭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어랏! 누가 방값을 안 내고 도망가네."
내 뒤에서 선글라스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특이점이 여기서도 하나 더 발견되었다. 그들은 이 소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꿈쩍 않고 라면을 먹으며 얼른 선글라스 남자가 현 상황을 보고 해 주길 바라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떤 외국인이 방값을 안 내고 도망가는 것 같아. 가방을 밖으로 막 집어던지네."
"그래?"
"우리 가방도 아닌데 얼른 이리 와서 그냥 라면이나 먹자!"
나 또한 그들에게 금방 동화되어 그저 냉장고로 가서 과일과 비스킷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우와~! 이 과일 어디서 사셨어요?"
"바로 앞 마트에서요."
"우와~ 체리 색깔 봐라! 죽인다!"
"우리 여기 와서 과일 처음 먹지 않나?"
"아무튼 잘 먹을게요."
"아니에요. 제가 더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
"아니에요. 오늘 설거지 당번 누구고? 줄리? 잭?"
"잭이네!"
그들은 또 그들만의 체계가 있었고 그 틈은 누구에게도 내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짧은 담소 후 내 방으로 들어와 외출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줄리가 황급히 나를 찾았다.
"기영아! 어떻게 해? 완전 큰일 났어!!"
"왜? 왜 그래?"
"아까 그 가방!! 그거 우리 가방이었어?"
"뭐라고? 아까 분명 그분이 너희들 가방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야. 우리 가방이 맞아. 리셉션에 얘기해서 경찰에 신고도 하긴 했는데... "
"더 큰일인 건 가방 안에 비행기티켓이랑 여권 그리고 우리 비상금까지 다 들었는데 그걸 몽땅 잃어버렸어."
느슨하고 체계적인 5인방이 갑자기 분주해지더니 모든 체계가 무너졌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들은 한국대사관과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바빴다. 다행히 그들 중 한 명의 부모님이 여행사에 계셔서 티켓은 재발급이 가능했으나 문제는 여권이었다.
"여권 복사본은 없어?"
"그런 거 없어. 여권을 복사해놨어야 하는데..."
신고한 지가 몇 시간이 되었는데도 경찰은 오지 않고 그들은 망연자실과 자포자기를 오가며 한국가족과 연락계속 이어갔다. 사건발생 반나절이 지나서야 경찰과 숙소 매니저가 나서서 현장검증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들에게 간단한 조사만 할 뿐, 종이를 한 장씩 주며 잃어버린 물품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리고 대사관측에서는 임시여권을 발급해 줄 테니 24시간 안에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호주 배냥 여행은 일주일이 전부였으며, 여행한 도시는 시드니와 브리즈번 이 두 도시뿐이었다. 또, 먹은 호주음식이라고는 내가 아침에 대접한 과일과 쿠키뿐이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카메라까지 잃어버려 그저 도둑맞은 배낭여행이라는 큰 추억만 남기며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들에게 라면값을 톡톡히 치르기로 했다. 비록 가방은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이 마지막 밤을 남기기로 했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사진을 다 찍어준 뒤 한국으로 돌아가면 써 준 주소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에게 최후의 만찬으로 피자한판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라면 꾸러미를 내게 주고 갔다. 이런 게 여행자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한국 오면 이 신세 꼭 갚을게요."
"부산에 한번 오세요. 맛있는 회 한번 사드릴게요."
"오늘 하루 저희 때문에 여행도 제대로 못하셔서 어떡해요?"
"기영아. 정말 고마웠어."
"기영아. 사진 꼭 보내줘야 돼. 내 호주 사진은 시드니랑 브리즈번 밖에 없어."
다음날 아침 그들은 전기밥솥만 들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씁쓸했지만 그들에게 호주는 비록 배낭은 도둑맞았지만 추억으로나마 남아있던 도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