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장애일까?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일까?
자기애愛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인데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과연 누구를 사랑한단 말인가?
하지만 조금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간을 내서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 즉, 한번 만난 사람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슬쩍 한 눈으로 위아래 스캔을 뜨기만 해도 대충 견적이 나와 예쁘다 안 이쁘다 혹은 잘 생겼다, 못생겼네, 아니면 눈이 왜 저래? 얼굴에 뭐가 났네, 어? 저 가방 이쁘다. 어디 거지? 시계도 이쁘네, 에구 손톱 하나가 나갔네, 나갔어. 아깝다... 뭐 이런저런 경험으로 슬쩍 스치기만 해도 상대방의 신상에 궁금해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같이 사는 가족들은 각자의 얼굴 생김새에서부터 성격에 이르게까지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온 경험으로 앞으로의 일까지 대충 짐작하며 대화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삶을 공유한다. 친한 친구의 성격 또한 모두 파악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면을 보며 당황하고 그래서 서운해하며 싸우기도 하고 별의별 일을 겪어가며 켜켜이 우정을 쌓아 올려 10년 20년 지기 친구를 만든다. 그 안에서 나의 성격 또한 함께 맞추어 나가며 서로의 성격을 알아가는 과정 또한 진한 우정의 한 단계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웬만큼 조율한다. 같이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니 100% 서로를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가족보다는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마음의 결론이 나야지만 결혼을 결심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듯하다. 가족보다 나를 더 사랑하다는 믿음이 없이 결혼을 한다면 그건 겨우 80%의 확신이다. 100%의 확신이 있는 출발선에 있지 않다면 그건 이미 반은 불행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부부가 된다는 건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가정하에 눈 커플이 씌고 그게 벗겨지면서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둘이 아닌 가족과 함께 풀어가는 숙제를 하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진짜 나로 착각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 젊은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면 그래도 조금 나았을 것을 그냥 스치는 말로 흘렸기에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세상에 있나?라고 쉽게 단정 지어 버리고 너무 쉽게 넘겨버리는 오류를 범했음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제대로 보았다면 지금보다는 일찍 사랑에 대해 알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전공과목을 개인의 적성과는 무관하게 눈치작전으로 경쟁률이 약한 과에 원서를 써서 정해야 할 때였다. 딱 학교 하나만을 정할 수 있고 단 3개 과를 택해야 하는 선택의 폭이 너무도 작은 ‘슬픈 눈치 작전 세대’라 내가 진정 무얼 원하는지 모를 그런 젊은이였다. 더군다나 한번 정한 전공을 전과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라 눈치작전으로 그냥 들어간 과에 감히 운명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해야 했다.
앞뒤 재는 건 젊은이의 피 끊는 청춘에 반하는 일인 거 마냥 좋으면 그냥 쭉 가야 하는 게 의리이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인 거처럼 배웠다. 한번 결정으로 대학의 전공이 되고 절대 바꿀 수 없는 숙명인 것처럼 연예의 시작도 같은 개념 선상에 놓였던 그런 시절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함이 있지만, 나를 진정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경험 부족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오랫동안 연애기간을 가졌다면 당연히 결혼으로 골인을 해야 연애기간 참고 인내한 참다운 결론이고 나에 대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위안이고 갈아탄 커플들의 등 뒤에 회심의 미소를 날릴 수 있는 나의 자만이었다.
다행히 아들 딸 잘 낳고 지금껏 아웅다웅 살고 있으니 망정이지 단지 다른 커플에게 보이기 위한 희생이 전부라면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을까? 그랬다면 이런 글로 나의 상대에게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비겁한 아내이고 겁쟁이 엄마로 낙인찍힐게 분명하다.
고사리 손을 잡고 이 먼 나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맨땅에 헤딩을 하러 바다 건너 무작정 이사를 해버렸다. 이사하는 곳이 너무 멀어 태평양을 건너는 무시무시한 먼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미국에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쌩 날것인 곳으로 날아왔으니 터닝 포인트라 하기에 엄청난 무리수를 둔 셈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야 했기에 이것저것 도전은 참으로 많이 했다. 대학에서 Esol(영어 미숙자가 다니는 클래스의 하나)에서 한 교수는 이제 그만 자기 수업을 들으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진정 학점을 잘 받아야만 학생비자가 유지되는 엄마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높은 점수로 눈총을 받아가며 공부를 했다. 그때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3년 안에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당찬 목표를 세워놓고 했으니 참 어이없는 도전이었고 무모한 목표였다.
학교 미술 선생님이 되겠다며 대학원 입학시험인 GRE를 열심히 했고 부동산 중개인이 좋아 보여 또 열심히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거 같아서 시작도 전에 포기했지만 말이다. 갑자기 헤어에 관심이 가면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고 헤어에서부터 네일 그리고 마사지 면허증도 단숨에 따버리는 기염을 토하면서 가족이 보는 나는 뭐든 맘만 먹으면 쉽게 해 버리는 엉뚱한 엄마라고 기억하는 거 같다. 친구들한테 엄마를 소개하자면 말이 길어진다고 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패션샾 오너? 헤어 디자이너? 화가? 칼럼니스트? 작가? 헐... 엄마는 도대체 직업이 몇 개에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았다. 대학 입학할 때부터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피아노를 미친 듯이 치다가 미술이 하고 싶어서 부모도 속여가며 학원을 다니고 미대에 합격한 거부터 위에서 말한 일들을 거침없이 해 나가는 나를 보며 남들이 말하는 나는, 열정적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남이 보는 나는 그렇게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하겠다.
내 안에 내가 없었으니 그저 순간적인 선택으로 무언가를 항상 갈망하고 쉽게 이루어지면 또 다른 어떤 꺼리를 향해 도전했다. 그런데 그게 만족이 되지 않으니 또 다른 무언가를 찾고 또 하고... 그러다 보니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걸 다 하고야 마는 그런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어떤 일본 영화에서 한 가지 사건을 놓고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볼 때는 사건의 내용과 결과가 천차만별로 난다는 결론을 내놓은 흥미로운 영화가 있었다. 한 사람을 놓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이 나처럼 달라질 수 있을까 싶다.
남편 잘 만나서 아무 걱정 없이 아이들만 키우고 미국까지 가서 큰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저 편하게만 사는 줄 안다는 건 한치 걸러 두치라고 왜 시댁은 그래야만 하는지 원... 한 친구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항상 바쁘게만 살고 있어서 내가 가만히 글을 쓴다는 자체를 놀라워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친언니는 내가 너무 집에서 가만히 있어서 생각이 많아 너무 깊게 들어갈까 봐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들으면 웃기다 하겠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감히 동경을 해보지도 않았고 내 머릿속에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단 1%도 없었던 직업이었다. 나의 어릴 적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부럽지도 않았고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어려운 길인지 쉬운 길인지조차 단 한 번도 인식하지 못한 직업군이고 희망란에 없던 항목이었다. 그랬던 글 쓰는 일이 지금은 직업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인생은 정말 무궁무진하고 흥미진진한 각자의 드라마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작하는 게 어렵지 일단 하나를 써보니 그 뒤부터 얽혀있던 실타래가 거미 똥으로 거미줄 치듯 이야깃거리가 줄줄 끊임없이 쉬지 않고 나와 집을 짓고 또 지어댔다. 그야말로 주변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쓰다 보니 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미국에 정착하면서 느꼈던 에피소드는 그냥 이야깃거리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토해 내면서 슬슬 나의 사고가 그리고 깊은 내면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며 했던 일들이 왜 그래야 했을까부터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은 내가 글을 쓰기 위한 그동안의 행보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든 그냥 되는 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냥 훅 한번 누구에 의해, 무엇에 이끌려 의도치 않게 하는 것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단지 멋져 보이고 단지 쉬울 거 같고 단지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자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결정하고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얇은 지식으로 마치 다 알고 다 이룬 것처럼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시간이었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간절히 원하고 어렵게 이룬 것들이 아니니 설사 높이 못간다한들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니 남들은 이런 내가 쿨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내가 만든 내 인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글로 설명할 수 있다면 명필을 흉내 내어 간단명료하게 누구나 알기 쉽게 휘갈기면 좋으련만 결코 함부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게 바로 이 대답이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챙기는 사람한테 흔히들 자기애가 강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칫 욕심으로 보이고 또 자칫 자기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로 낙인찍힐 수 있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남보다 우선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게 결코 아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일단 나를 면밀히 그리고 아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게 키포인트이다. 처음에 말한 엘리베이터에서 쓱 한 번만 보고도 그 사람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나를 객관화해서 보는 해안이 필요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는 게 아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진정 추구하는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무엇을 해야 진정 나에게 기쁨이 오는지, 내가 나를 알 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나를 사랑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이 읽힌다. 그래 만약 나라면 이걸 이렇게 하고 싶을 텐데... 또는 내가 서운할 때 만약 나라면 이렇게 해주었을 텐데.. 그럼 내가 서운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마음이 들었을 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였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은 다르다. 내가 이걸 원하니까 남도 그렇게 원할 거야 하면서 양보하게 되고 말하기 전에 먼저 챙겨주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가 원하는 걸 말하기 전에,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주는 게 감동이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긴다. 내가 원하는걸 상대방이 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걸 먼저 해주고 내가 원치 않더라도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원하는걸 상대방도 말없이 해주면 좋을 거라는 걸 아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은 내가 간만큼만 보인다고 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만큼만 남에게도 마음을 쓸 수 있다. 내가 나를 모를 때는 당연히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뜬구름 잡듯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지금도 나 자신을 자신 있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못난거 투성이고 이쁜 사람을 보면 나도 그녀처럼 이쁘면 좋겠다 부러워하고 남의 잘 쓴 글을 보면 나는 왜 그렇게 못쓸까 자책하고 요리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워 꼭 닮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닮고 싶고 부러운 것 까지는 좋지만 나에게 있는 더 좋은 사랑하는 것들은 어느새 저 멀리 보내 버리고 부러움에 휩싸인 나를 보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습으로 나를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이쁘다, 잘했다, 칭찬하면 좋을 것을 남에게 칭찬하는 많은 것들의 십 분의 일이라도 나를 칭찬하면 나 또한 춤을 추며 좋아라 할 텐데.. 남에게는 이쁘다, 멋지다 백번을 말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왜 이것밖에 못하느냐며 타박하고 그러면서 나를 더욱 못난이로 만들어 버리고... 이런 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다. 내가 나를 이쁘다 말 못 하고 나를 구박하는데 어느 누가 나를 이쁘다 말하고 진정으로 그런 말이 귀로 들리겠는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니 그럭저럭 아주 못난 구석은 없다. 엄마로서 잔소리 안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고 남편한테도 밥 맛 나게 가끔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고 글에 대한 칭찬도 많이 듣고 있고 누군가가 이쁘다는 말을 하면 이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만하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자기애가 강하다는 말이 이제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장애가 아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자기에게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 남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듯하다. 자기애가 발동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엉뚱한 말로 결론지어질까 심히 걱정이다. 적당히 하자.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뭐든 과하면 생채기가 나는 법이니까... 그래도 오늘의 나는 참으로 이쁘다. 그럼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