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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Oct 21. 2023

옥수수의 운명

여기 옥수수의 운명은 한국의 운명과 다르다. 한국의 옥수수는 노란 이가 드문드문 빠진 듯 삐죽이 키가 달라 얼기설기 수줍게 다른 모습으로 서로 키재기에 바쁜 반면, 미국의 옥수수는 미국 사람처럼 크고 똑같은 키와 똑같은 개량종으로 일렬종대의 군대식 모습을 하고 있다. 오이와 고추처럼 하나의 줄기로 크지만 서너 개의 옥수수의 키워낼 뿐 다산의 식물도 아니고 고춧잎이나 호박잎처럼 열매 이상의 먹거리도 제공하지 않는 도도하고 딱 부러지는 식물이다.     


파릇한 초록으로 아주 나지막하게 싹이 나면 옥수수를 이제 막 심은 봄의 소리다. 키가 내 발목만큼 자라 푸르고 여린 잎들이 듬성듬성 보이면 봄이 익어가는 소리고, 허리만큼 키가 자라고 초록 잎들이 빼곡해지면 이른 여름을 알리는 싱그런 태양 빛의 따가움이다. 시간의 흐름이 옥수수의 키만큼 자라고 있음을 세월이 재촉이라도 하듯 이때부터 나의 바람은 그만 컸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여지없이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가는 가을에 더 이상의 싱그러움은 없다. 이미 다 커버린 옥수수는 초록이 아닌 늙수그레한 노랑으로 기다란 수염을 기어이 늘어트린다. 수염이 쳐지면서 옥수수가 비쩍 말라가며 누런색에서 빛이 바래고 바래 아주 하얗게 떠버린 종이 짝처럼 말라지고 바래면 밑동이 싹둑 잘려나가 버릴까 매일 불안해진다.     


바로 지난 토요일, 아침마다 조마조마했던 나의 마음을 싹둑 자르기라도 하듯 처량 맞게 뚝 잘려 밑동만 겨우 그 넓은 들판을 뾰족뾰족, 얼기설기 수놓고 있었다. 아! 마음이 아프다. 아픈 마음은 단지 옥수수의 잘린 밑동 구리 때문만은 아니다. 곧 닥칠 싸늘한 겨울바람의 예고가 있기 때문이다. 짧은 밑동으로 찬 바람이 불고 그 자리에 눈의 온기를 담아 흔적 없이 사라진다. 비옥한 다음 해의 땅을 위해...      


난 이런 옥수수의 위용을 좋아한다. 


그리고 흔적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지우는 자연 섭리가 좋다. 깻잎처럼 씨를 바람에 날려 원치 않을 수도 있는 땅에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놓는 거에 비하면 얼마나 깔끔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만의 길인가? 호박처럼 땅으로 번식하지 않은 점도 멋지다. 꿋꿋하게 하늘을 항해 뻗어 나가는 오롯한 행로 또한 마음에 든다.     


옥수수는 인생의 긴 여정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엔 보기에도 아까울 만큼 쑥쑥 초록으로 키가 큰다. 드넓은 평야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고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뽐내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의 크기와 빛깔로 도도히 커나간다. 성장이 멈추고 열매가 익어간다. 성장하는 관계 속에서 즐겁지만 외로움을 경험한다. 성장시켜야 할 열매를 위해 기꺼이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그들을 키워낸다. 양분을 고루 나눈 키다리 아저씨의 수염은 쳐지고 빛은 점점 바래서 누렇게 뜨고 삐쩍 말라간다.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옥수수 열매는 사람에게는 건강한 먹거리와 동물들의 사료로 쓰이고 마지막 남은 마른 옥수수수염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 시키는 맑은 차로 희생한다. 일단 맛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얇다. 그리고 담백하다. 커피의 쓴맛과 단맛에 익숙한 나에게는 입안에서 돌다 목 넘김까지 1도 느껴지지 않는 밋밋함, 그 자체인데도 입안을 깔끔하게 정화 시키는 청량감이 있다. 


그렇다고 사이다같이 톡 쏘는 상큼함을 가장한 가짜 맛이 아니다. 맑은 조갯국이 시원함을 주는 것처럼 그런 담백하고 맑은 기품 있는 맛이다. 그렇다고 그린티나 밀크티처럼 물 건너온 고급진 이름과 맛도 아니다. 그런 고급진 이름의 진중한 뒷맛의 텁텁함도 남기지 않는다. 입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도도하고 시크한 맛이다. 옥수수가 남긴 마지막 수염의 뒷맛은 무언가를 남겨야 하는 진한 인간의 욕망을 깔끔하게 날려버린다. 멋지다.     


나 또한 이런 옥수수 같은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단맛과 쓴맛이 진한 그런 맛이 아닌 조용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남은 자리는 빈자리로 다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 때 그냥 그런 사람이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갔노라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엄마가 가꾸셨던 작은 텃밭의 옥수수 울타리처럼 그냥 누군가의 울타리로 남으면 그뿐인걸... 오늘도 따뜻한 옥수수 차를 마시며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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