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yu Jul 20. 2020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문유석 <쾌락독서>

맘의 양식, 지식 어느 것도 줄수 없지만 흐뭇한 미소하나면 충분한 너에게

#쾌락독서 #문유석
 
(1) “마음의 양식도 지식의 향연도, 그 어느 쪽에도 가깝지 않지만 그저 흐뭇한 미소 하나면 충분한 이들에게”
 
# 여느 날처럼, 고된 업무를 끝내고 책방으로 향했다. 꿀잠을 위한 수면제를 찾는 중,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외양의 먹잇감을 발견했다. 안구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초록색 표지와 짧디 짧은 제목! 잠들기 전 편안한 마음으로 영접하기에 완벽한 겉모습이었다. 피곤에 찌들어 좋은 수면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화방에 온냥 키득거리며 읽어내려간 탓에 꿀 같은 낮잠시간에 눈 한번 붙이지 못했다. (책도 사람도 앞으로는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자.) 마음의 양식도, 지식의 향연도 아닌 것이 계속 붙잡게 하는 매력이 있다. 아니, 그러한 기대조차 법조인 출신 작가라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책”을 통해 연상되는 그 어떤 상투적인 것(마음의 양식, 지식 혹은 그 어떤 것)들은 필요없더라도, 그저 흐뭇한 미소 하나면 충분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2)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는 아니거든요.(p.114)”
 
“<슬램덩크> 체격은 좋지만 팀 동료만큼 천재적 재능이 없는 센터 변덕규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


(중략)


<무한도전>이 <무모한 도전> 당시 지하철보다 빨리 달리기 등 말도 안되는 도전들을 멤버들이 차례로 시도해서 미친놈처럼 애를 쓰다가 실패해서 넘어진다. 함께 용을 쓰다가 좌절해 있던 유재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이번에 도전했던 OOO씨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큰 경사라도 났다는 듯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며 다음 도전자의 등을 떠미는 것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두 가지 말이 참 좋았다. 팀을 위해 각자의 역할에서 충실하자는 맥락에서 좋다는 것이 아니다. 난 그렇게 이타적인 인간이 못된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 힘이 되는 말이라서 좋았다. (p.113)”
 
# 보이는 것보다 상념이 꽤나 많은 나는 수많은 실패, 실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능력부족, 열등의식, 속물근성, 이기심, 뻔뻔함, 냉정함, 남이 안 보는 데서 저지르는 실수들....
생각해보면, 흠결 그 자체보단 항상 실패와 실수로 인한 자기환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온 것 같다. 마치 내가 팀의 명운을 짊어진 에이스가 된 냥,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보다 늘 앞서있던 존재가 된 것처럼 나의 실패에 조급해왔다. 저자의 말처럼 "이미 과분할 만큼 실제 능력 이상의 좋은 결과를 운 좋게 얻은 주제에 별 노력 없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것 같은 과대망상(p.113)" 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러한 자기환멸조차 ‘수많은 인간 중에 나는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는 오만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혐오가 일상화된 시대에 위와 같은 모습들로 나 자신까지 혐오의 대상이 된 것 같은 때에는 저자의 말을 따라해보자.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는 아니거든요.(p.114)"
 
 
 
 
(3)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p.195)"
 
#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자주 내뱉었다. "극단적인 주장이 쉬운 해법은 될 수 있지만 옳은 해법은 될 수 없다. 우리는 ~~문제에 대해 조금 더 합리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평소 약간 느긋하며 동시에 살짝 삐딱한 성향 탓인지 정치, 국방, 젠더, 환경 등 갖가지 현안에 대해 `합리성`을 무척이나 강조했던 것 같다.
이 책을 비롯한 일상에서의 여러 간접 경험들은 견고했던 나의 합리성과 중도주의 노선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주었다.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에 미칠 원론적인 영향만을 생각하던 내가,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를 하며 취업난과 생활고에 절규하는 청년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수직적 위계구조의 극단에 위치한 군대라는 집단에서 부대끼며,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왜 그 자리에서 그들의 폭력을 참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아픔에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공감’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노동 착취에, 가난의 아픔에, 성폭력의 고통에, 전쟁의 트라우마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견해를 밝히라는 사회의 요구 또한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잊지 않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