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팩트’를 찾아서
예상치 못한 부상에 따른 입원으로 요 근래 읽고쓰는 일에 소홀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가을이 지나기 전에 잠시 멈추었던 글쓰기를 재개하기로 마음먹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을 마주한다. 그래서인지 뉴스라는 이름으로, SNS라는 형태로, 유튜브라는 플랫폼으로 가지각색의 정보들이 쏟아지는 요즘 사회에서의 화두는 ‘사실(Fact)’의 여부이다. 팩트체크, 팩트폭행 등 신조어가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팩트’는 진부하다 못해 닳고 닳은 듯한 느낌까지 주는 단어가 됐다.
최근 몇 년 사이 언론과 대중 그리고 미디어가 팩트에 집중하게 됐다는 것은 희망적인 소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왜인지 씁쓸한 감정이 앞서는 것은 ‘알릴레오 아니면 홍카콜라’, ‘서초동 아니면 광화문’, ‘적폐세력 아니면 토착왜구’라는 팩트를 둘러싼 양극화의 모습이 채 잊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책은 우리가 팩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사실충실성(Factfulness)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하룻밤 사이에도 우린 너무나 많은 사실들을 목도하지만, 그러한 사실들을 균형있게 바라볼 수 있는 세계관을 갖추고 있는지 묻고있는 것이다.
"민간 부문 대 공공부문에 관한 토론이 대부분 그렇듯 답은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다. 사안마다 답이 다르고,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 (···) ‘A or B’가 아닌, A와 B를 때에 따라 모두 활용해야 한다."
(p.286 단일관점본능 中)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 확립을 방해하는 10가지 본능 중,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단일관점본능에 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면 좌빨이 되고, 천안함 순국선열을 애도하면 수구꼴통이 되는 사회에선 그 어떤 표현도 금기시된다. 민주화를 이야기하면 586세대, 산업화를 이야기하면 베이비붐 세대가 되는 세상에서 ‘그냥 사람’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이러한 주장을 누군가는 무책임한 양시론, 양비론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확증편향이 결코 양비론보다 나을 것 없고, 경도된 신념이 우유부단한 고찰보다 가치있지 않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들은 하나의 해결책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판단을 원하는 우리의 본능은 때론 복잡한 세상사를 보기좋게 비틀어버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늘도 여느날처럼 뉴스를 읽고 포탈의 댓글들을 보며, 팩트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 그 누구도 팩트에 충실하지 못하는 현대적 아이러니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