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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Sep 05. 2021

기억과 기록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읽고 쓰는 것은 기억과 기록의 힘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p.204, 윤리는 기억이다 中)


 세 달만에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문득 어쩌다가 내가 기록할 것이 이토록 줄어들었는지 생각했다. 나에게 세 달이라는 시간은 꽤나 무거운 시간이었다. 발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의 근원이 부주상골이라는 악세사리 뼈 때문임을, 팔과 목이 저린 것이 일자목 때문임을, 혀 아래에 올라온 물혹을 점액낭종 또는 하마종이라고 부른다는 것(아직까지도 이 작은 구슬의 이름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을 몸소 알게 되었다. 석달만에 글을 자기변호로 시작하는 것은 아프다는 핑계가 그나마 덜 부끄러운 핑계인 것을 알기 때문일까.


세 달의 휴지기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무언가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기적이게도, 나 자신의 현재가 가장 빈곤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기에 다른 누군가의 희노애락에 내 생각 한 스푼을 얹는 것은 사치였다. 하루하루 발목이 끊어질 것같은 통증에 무기력과 우울감은 내 현재의 폭을 더욱 조여왔다. 1년 전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은 연유는 현재라는 공간이 너무도 좁아 숨통을 조여왔기 때문이고, 독후감을 다시 쓰는 이유는 기억과 기록의 힘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p.32,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中)


1년이라는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을지 목도하기 두려운 계급인 병장이다. 과거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과 내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비판과 증오의 대상이 미래의 나 자신이었다는 모순을 직시하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부분의 예비역 병장들은 과거를 잊는 길을 택한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자> 중 끈질기게 찾아오는 탈영병 승영(서장원 분)을 피해 애인을 만나려는 예비역 병장 태정(하정우 분)처럼, 끝없이 찾아오는 기억이란 존재를 피하기 위해 현재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제 더이상 피할 곳이 없어질때쯤 기억은 젊은 시절 추억으로 미화되고 때때로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내가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굳센 신념으로 모든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내 지난 날을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정도는 되고픈 작은 희망때문이다. 살아가며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적잖이 방황하겠지만, 그 방황속에서도 결국 기억해야 할 것을 글로 남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역사학도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p.72, 승리의 서사 中)


드라마 <멜로가 체질> 속 은정(전여빈 분)의 말처럼 삶이란 "좋았던 시간의 기억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 밖에 없는 시간 대부분을 버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행복과 불행의 불균형은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고 이러한 기억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서사를 점점 비극으로 치닫게 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승리의 서사이다. 열번 중 세번만 안타를 쳐도 스타플레이어로 여겨지는 야구처럼 우리 인생도 열번의 기회 중 아무리 잘해도 일곱번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세번의 성공은 '일곱번의 실패로 부터 얼마나 가치있는 것을 배웠는가'와 '의미없는 실패를 얼마나 줄여나갔는가'에 달려있다.


결국 우리네 인생도 잘 성공하는 것보다 잘 실패하는 것이 결정한다. 인생의 첫타석과 두번째 타석에서 빠른 공에 타이밍이 늦어 삼진아웃을 당했다면 그 다음 타석에서는 더 빠른 타이밍에 스윙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 앞선 두 타석에서의 실패로 인한 배움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비극이겠지만, 우리는 이 비극을 성공의 서사로 바꾸어 놓을 수있는 학습능력을 갖췄다. 야구라는 드라마가 보여주듯 우리네 인생도 삼진의 경험 속에 숨어 있는 홈런의 약속을 잊지 않는 자만이 승리의 서사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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