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루토 Apr 26. 2023

미국에서 출산하기 1

나이 서른여덟에 둘째를 낳았다 1

아들이 늦게 잠든 밤이다. 매일 밤 같은 순서로 이제 막 5살 반이 된 아들을 재운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이고 두세권의 책을 함께 읽고 기도를 한 후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잠이 든다. 아들이 잠들고 나면 잠시 같이 누워 있는다. 3월 24일 2023년의 밤도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평범한 날이 평범치 않은 날로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37주차 임산부였던 나. 퉁-하고 밑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풍선이 터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미 첫째를 낳을 때 겪어봤던 느낌이다. 그 때도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워있다가 양수가 갑자기 터졌었다. 


올 것이 왔다. 첫째도 37주 2일차에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나왔기에 둘째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37주차에 접어들고 난 후엔 언제든 출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날짜도 똑같을 줄이야. 오늘 나는 37주 4일차 임산부. 산후 조리를 도와주겠다고 부모님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국하신지 고작 이틀이 지난 후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번엔 아기가 배 속에서 39주까지는 버텨주길 바랐는데 말이다. 양수가 샐까봐 조심스레 방에서 걸어나왔다. 


"여보, 엄마, 양수 터진 것 같아."


가족들 모두가 당황했다. 화장실로 가보니 분명히 오줌은 아니다. 약간의 피비침도 있다. 심상치 않단 생각이 들었다. 바로 L&D (Labor and Delivery) 센터로 전화했다. "진통이 오면 이 곳으로 바로 전화주세요,"라며 며칠 전, 간호사가 포스트잇에 급하게 적어준 전화번호와 주소가 바로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침착하게 정황을 파악했다.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양수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며 진통이 시작되는지 지켜볼 수 있구요. 그냥 지금 병원에 와서 양수인지 확인해 보는 방법이 있어요."


나는 이미 출산이 임박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샤워를 해도 되나요?"

"네, 그럼요."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르는 출산 과정을 앞뒀으니 미리 샤워를 마친 후 병원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임산부들은 출산 준비물을 미리 싸놓는다. 첫째는 정신없이 낳았지만 둘째만큼은 미리 가방을 챙겨두리라 했건만 이번에도 늦었다. 결국 막판에 부랴부랴 짐을 챙기게 되었다. 내가 입을 여분의 옷, 신생아 옷, 머핀 등등 약간의 간식 (무척 유용했다), 칫솔, 충전기, 카메라 등을 챙겼다. 첫째 때 사진을 제대로 많이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남편에게 이번만큼은 따로 카메라를 챙기라고 했다. 짐을 싸는 동안 밑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걷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강한 느낌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 "밑빠지는 느낌"이 진통의 시작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아들이 잠에서 깼다. 


"동생 나올 때가 되었으니 엄마 아빠 병원 갔다올게, 할머니 할아버지랑 잘 있어."


아이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드디어 나온단 소식에, 그 의미를 다 알진 못하면서도 신나 했다. 그간 미리미리 동생이 나올 때면 1-2박 정도 엄마 아빠가 병원에 가있을 것이라고 설명해두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에 주소를 쳐보니 심야의 시애틀 도로는 뻥뻥 뚫려 있다. 출퇴근 길막히는 시간에 진통이 올까봐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20여분 걸리는 거리. 시간은 새벽 한 시. 조금씩 통증이 규칙적으로 느껴져서 진통 앱을 켰다. 십여분 간격으로 30초 정도의 진통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10-15분 사이의 진통이었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니 병원까지 걸어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밑이 빠질 것 같은 강한 느낌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해서 걷는 것이 불편했다. 뒤뚱 뒤뚱 걷는 나에게 남편이 휠체어에 앉겠냐고 물었는데 우선은 걸어보겠다고 했다. 심야의 고요한 병원 리셉션에 도착하고 내 이름을 말하니 바로 몇 층으로 올라가라고 일러 준다. 딱 봐도 아이가 곧 나올 것 같은 만삭의 내 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힘내란 듯 재빨리 길을 알려 주었다. 6층에 도착하고 나니, 한 시간 전에 통화했던 간호사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워싱턴 대학교 병원에 입성했다. 


나와 통화했던 간호사의 이름은 Tammy였다. 차분하게 나를 맞이한 그녀는 우선 정말 양수가 터진 것인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흘러나오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의사가 오길 기다려야만 했다. University of Washington 병원은 대학 병원인만큼 여러 레지던트들이 돌아가며 진료를 볼 예정이었다. 이미 첫째를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 병원에서 낳아본 경험이 있기에 익숙했다. 


곧 의사가 들어왔다. Cervix Check를 먼저 했다. 자궁문이 열린 정도를 보는 것인데 3센티가 열렸다고 한다. 여기서 놀랐던 건, 예상과 달리 양수가 터진 것은 아니라는거다. 분명히 풍선 터지듯 뭔가가 터져 흐르는 걸 느꼈는데 말이다! 양수가 터진게 아니면 출산의 징조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대로 입원도 못하고 그대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걸까? 내 직감은 출산이 임박했는데, 공연히 집에 돌아갔다가 바로 다시 병원으로 달려와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출산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어찌 되려는 걸까?


(2편에 이어 씁니다)

작가의 이전글 [포틀랜드 일기] 연말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