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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 Mar 27. 2023

아이가 넷입니다

우리집은 아이가 넷인 가정이었다. 

첫째는 딸, 둘째도 딸, 셋째도 딸, 넷째가 아들. 


어릴 적에는 형제가 많다는 이유로 주목 받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겐 부모님의 사랑을 덜 받는 이유가 되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 집안처럼 비춰질 때가 많아서 내가 보기에 부모님은 강박적이고 처절해보였다.


아이 넷 가정에 둘째 딸로 자라는 삶이 어떤지 상상이 되는가.

많은 결핍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나는 거의 대부분 물려입은 옷을 입고 자랐고, 물건도 니 것 내 것이 따로 없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언니와 같은 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교복까지도 언니 것을 물려입고 자랐다. 


같은 교복이어도 해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데 언니와 내가 세 살 터울이니 3년 전 모델을 입은 나는 같은 학년 안에서 남들과 다른 티가 났다. 

선생님들이 뭐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복이 왜 남들과 조금 다른지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에게 늘 설명해야 해서 귀찮았다. 한편 물려입은 교복이 부끄럽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하나에 500원 하는 새 공책을 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집에 헌 공책이 몇 권 있기는 했지만 지난 해 누군가 쓰고 남은 몇 장 밖에 딸리지 않은 공책을 쓰기가 싫었다. 


신학기에 다른 아이들이 쓰는 새 공책을 쓰고 싶어서 엄마에게 새 공책을 사달라고 했다. 그것 하나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조르고 조른 끝에 엄마는 결국 마지못해 같이 문구점에 가서 새 공책 한 권을 사주었다. 



형제자매가 많으면 다복하고 오손도손 서로 위하며 살 것 같은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다투고 잘 되지 않으면 불만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투쟁의 연속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넷은 서로 친하게 자라지도 못했다. 

대화가 없는 가정 속에서 우리는 늘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으로 길러졌던 것 같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때로는 엄마를 대신한 가사일이었고, 동생의 하원 도우미였고, 공부였다.

엄마가 경력 단절을 끝내고 일터로 나가고 나서부터 내게는 그런 책임이 주어졌다. 

이에 더하여 틈만나면 공부하라고 쪼아대는 엄마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덕분인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늘 공부에 얽매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엄마는 시험 점수를 잘 받아 오는게 삶의 목표인 것처럼 나를 공부하라고 몰아세웠다.  


공부를 좋아하기 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혼나고 싶지 않아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게 나를 증명하는 길이었다.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안 안에서 암묵적으로 가야할 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학급 대표로 졸업생 상을 받았다. 그게 꼭 성적순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반에서 늘 상위권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에 종합 성적으로 상을 주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나에게는 지금 그 시절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 중, 고등학교를 거치며 더욱 공부에 대한 몰입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경쟁적인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줄세우는 교육환경, 그리고 우리 세대의 성적 등급제는 1등급이 아닌 사람은 모두 루저로 만드는 게임이었다. 


가족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형제 자매와 좋은 대화를 나눠본 적도, 같이 놀이나 스포츠를 열심히 해본 기억도 많이 없다.  

오로지 공부 시켜서 좋은 대학 보내는게 목표였던 부모님의 시대 착오적인 생각으로, 어쩌면 나는 가정 안에서 누리고 배워야 할 것을 많이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나는 나보다 잘나보이는 언니를 쫓기듯 따라 잡으며 살아가야 했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다.  언니는 결정적으로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갔다. 언니는 공부를 더 해서 석사까지 했기 때문에 심지어 학벌도 학력도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대학에 가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쫓기듯 살아온 세월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사람에겐 저마다 만들어갈 제각기 다른 길이 있고 삶이 있는데, 내게 주어진 길은 한 가지인 것처럼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것을.    


누구를 탓해야 할까. 부모를 탓해야 할까. 아니면 경쟁적인 교육 환경을 탓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모두에게 속아버린 나 스스로를 탓해야 할까.

이제와서 내게 불쑥 드는 허탈함과 억울함은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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